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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9-26 20:34:28
  • 수정 2018-09-27 00:3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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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음악공연예술 대학은 현대사 비극의 서막 제공했던 히틀러 총통의 전당(Führerbau)
-영국수상 챔버린, 뮌헨협정 체결한 후 귀국해 “우리 시대 평화는 이루어졌다”고 의기양양
-1993년 북한의 NPT 탈퇴 이후 24년간 북한에게 핵무기 고도화와 미사일 개발 시간 허용


▲ 뮌헨 음악공연예술 대학은 2차세계대전의 비극이 잉태된 총통의 전당이었다. [제3의길]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2014) 성악부문에서 우승하고 2018년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올림픽 찬가를 불러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소프라노 황수미씨가 유학생으로 공부했던 뮌헨 음악공연예술 대학(Hochschule für Musik und Theater München, 영어표기 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Munich)은 현대사의 숨어있는 비극의 서막을 제공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뮌헨 쾨니히스프라츠(Königsplatz)에 있는 히틀러 ‘총통의 전당(Führerbau)’이었다. 이 건물에서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던 것이다(악한 기운이 머물고 있는 이 곳에 나팔소리, 피아노소리, 소프라노 소리, 북소리 등으로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악령이 죽게 되므로 음악대학에 풍수가 맞다).


2차대전 사망자 8천만의 비극을 가져왔던 2차 세계대전의 서막 <뮌헨 협정>에서 시작된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은 독재자 히틀러의 사기극에 속고 싶었던 영국 수상 챔버린(Neville Chamberlin)에 의해 추진되었다. 1938년 9월 30일 영국 수상 챔버린은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일부를 양보해주면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총통의 전당(Führerbau)에 들어갔다.


히틀러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도자이며 이탈리아 왕국의 제1대 ‘두체’라는 타이틀을 가진 베니토 무쏘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그리고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가 참석해 조약에 서명했다.


히틀러는 이들 얼간이 지도자 모두를 기만(欺瞞)한 가운데 뮌헨 협정으로 무력 팽창 정책을 위한 시간을 벌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시작으로 2차 대전을 일으켰다. 챔버린은 협정을 체결하고 ‘총통의 전당’을 빠져나와 귀국한 후 마치 평화의 수호자인 양 “우리 시대 평화는 이루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환호를 받았다.


김대중-김정일 회담 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이제 영원히 없다”고 소리쳤던 김대중 씨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노무현-김정일 회담도 북한핵에 눈 감고 일방적 퍼주기 발표를 했다. 문재인-김정은 회담의 결과도 뻔할 뻔자이다.


뮌헨협정은 히틀러의 사기극이고 챔버린의 큰 오산이었다. 그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데에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 1925>에서 일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협정으로 만들었던 베르사이유 조약(1919)에서 잃어버린 7만 평방 km의 영토를 회복하고 여기에다 또 동구 국가의 땅을 정복하자는 뜻의 ‘독일 국민의 생존 공간(Lebensraum)’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마치 북한이 핵 국가가 되겠다는 것을 북한 헌법에 명기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1938년 야당이 배제된 선거였지만, 독일 제국 의회 총선거에서 히틀러는 나치당 선거 벽보에 그의 대외정책 성공 과정과 영토적 야욕을 선전했다.


•1933년 국제연맹과 베르사이유 조약 탈퇴(비교: 북한의 핵확산 금지조약, NPT 1993년 탈퇴)
•1934년 독일제국 군대 재건 착수
•1935년 자아르 지역 영토점령과 국방권 회복
•1936년 라인란트 점령
•1937년 일차대전 독일 단독 책임론 허구를 까부셨다
•1938년 (3월14일)오스트리아와 합병, 대독일제국 수립
•1938년 9월30일 뮌헨 조약


히틀러의 다음 먹잇감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그는 다민족 국가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지역에서 정주해 살고 있는 독일계 주민들을 선동해 그들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게 하였다.


독일계 주민들의 자치권 요구가 도를 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체제를 부정할만큼 위협적으로 됨에 따라 주데텐 지역(Sudetenland) 위기가 발생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내 약 35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살고 있는 이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아직 히틀러에 완전 장악돼 있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Ludwig Beck) 대장이 히틀러의 전쟁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그는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르더(Frank Halder) 장군도 전쟁은 안된다는 생각에서 쿠데타를 결심하고 영국정부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챔버린은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는 양보를 통해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집착은 병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집착에 사로 잡힌 지도자는 망하게 돼 있다. 챔버린은 평화를 향한 열차의 운전석에 앉아 이 위기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겠다며 1938년 9월15일과 9월22일 연달아 독일로 날아와 히틀러와 회담했다.


▲ 뮌헨회담에 함께한 무솔리니, 히틀러, 달라디에, 체임벌린(왼쪽부터).[제3의 길]


이 때는 무쏘리니도 챔버린을 도와줘 평화적, 외교적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목적에서 뮌헨협정이 성사되었다. 그래서 챔버린은 뮌헨의 쾨니히스프라츠(Königsplatz)에 있는 히틀러 총통전당(Fuehrerbau)에 들어갔다. 유화정책(Apeasement Policy)은 이렇게 그 절정에 달했다. 유화정책 기간인 1933~1939년 기간에 전쟁은 연기되면서 갈등은 축적돼 최고 단계로 치달았다.


1938년 10월1일부터 독일군이 점령했던 주데텐 지역에서 독일군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도 이 지역에서 철군했다. 뮌헨 협정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데텐 지역을 제외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잔존 국가의 존립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다.


이 협정을 통해 히틀러와 챔버린은 9월30일 독-영 불가침 협정에 서명하고 협약 성명에도 합의, 발표하고 모든 분쟁 사항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합의했다.


1993년 북한의 NPT 탈퇴 이후 24년간 북한에게 핵무기의 고도화와 미사일 개발의 시간만 허용해 주었다. 히틀러는 그의 복심을 숨긴채 영토적 요구를 더 이상 제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서는 독일의 ‘생존 공간(Lebensraum)’이란 용어로 팽창정책 이데올로기가 선전되고 있었다.


1939년 히틀러는 체코와 폴란드를 침공했다.


[덧붙이는 글]
[제3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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