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9-25 09:42:15
  • 수정 2018-09-25 11:00:22
기사수정


▲ 여성 의병장 윤희순 선생 초상 [WT DB]


그녀의 숭고한 삶을 추모하면서 이 글을 쓴다!


윤희순(1860.6.25~1935.8.1)은 구한말 제25대 철종(재위 1849~1863)때 태어나, 제26대 고종(재위 1863~1907)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병장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로서의 큰 족적을 남겼다.


윤희순의 의병활동은 그녀의 나이 36세 때인 '을미의병'(1895년)에서, '을사의병'(1905년), '정미의병'(1907년)기간 사이에 춘천과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을 시작하지만, 1910년 한일병합이 된 이후는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하자(을미사변), 고종임금은 일본의 잔악함에 위기감을 느끼고 궁인의 가마를 타고 세자와 함께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896.2.11, 아관파천) 1년간 지낸 후, 1897년 2월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다. 또한 서재필, 이상재 등이 만든 최초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도 1896년 이때 만들어졌다!


그 이후 1905년(을사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을사늑약(을사5조약)'을 요구하고, 이에 근거하여 일본에게 '외교권박탈'을 당한다.


1906년 2월 일본은 공사관대신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 9월까지 본격적으로 조선을 감시감독하는 등 전반적인 통제를 시작했다.


1907년(정미년),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외교권 강탈'에 대한 일본의 탄압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만국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등의 특사단을 파견했으나 임무는 실패로 끝나고, 이준열사는 그곳에서 자결한다.


1907년,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법권 박탈'과 우리의 '군대해산'까지 한다.


또한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신 제27대 순종을 즉위시킨다.


1909.10.26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의 통감 '이토히로부미'를 29세의 젊은 '안중근의사'가 척살하는 등 의병운동이 계속되었지만 조선은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1910년(경술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1945년(을유년) 해방될 때까지 35년간 긴 식민기간(일제강점기)이 지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침략은 70년간으로서, '전반 침투기' 35년(1875~1910)와 '후반 식민기' 35년(1910~1945)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75년 치밀하고 의도적으로 꾸며진 일본의 '운요호사건'에 말려들어, 1876년 강제로 맺어진 '강화도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에서부터 일본의 침략은 시작되었다.


'병자수호조약'은 강자에 의한 가장 불평등한 조건으로 맺어진 강압적인 국제조약이었다.


한편 1953년 휴전협정 때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전술로 얻어낸 '한미방위수호조약'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약자의 이익이 최대로 반영된 호혜조약이란 점에서 보면 일본이란 나라와 미국이란 나라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이후 이들의 악랄하고 잔혹한 행동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 해인 1896년(병신년), 전국적으로 머리 상투를 짧게 자르는 '단발령'이 강제로 시행되면서부터 일본에 대한 반일항쟁운동이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 태어나 1876년 만16세에 고흥 유씨 집안 장남 유제원과 결혼했다.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장남, 팔도창의대장 유인석의 조카이기도 하다.


1895년 '을미사변'에 분개한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으로 출정하자,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했다(그때 만 36세).


또한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등을 창작 보급하여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냈다.


그 이후 경고문, '왜놈대장 보거라'를 써서 여성들도 의병활동에 나설 것임을 천명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대장이 되어 싸울 때, 춘천시 남면에서 30여명의 부녀자를 동원해 군자금을 모아 지원했고, 쇠와 구리 등을 구입해서 화약과 탄약을 만드는 등 항일투쟁에 참가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후, 1911년 가족 모두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 사망, 2년 뒤 1915년 남편 유제원 마저 사망하지만 윤희순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두 아들 '유돈상'과 '유민상'을 독립운동단체에 가입시키고 뒷바리지에 전념했다.


1935년 큰아들 '유돈상'이 제사를 지내려 집에 들렀다가 중국 푸순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끝에 사망하자, 아들의 죽음 앞에 울분을 참지 못해,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삶을 기록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숨을 거두었다. (1935, 76세)


윤희순의 가족은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두 아들까지 모두가 의병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그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져 잘 알려지지 않은 2,000여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일을 확대해 나가야겠다.


윤희순, 유관순, 남자현, 박차정, 이화림, 안경신등 여성독립투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


▲ 여성 의병장 윤희순 선생의 일생을 담은 만화 전기


최근 남북정상회담으로 겉으론 평화로워보인다.


그러나 남북간의 전쟁위험이 없어진듯 보이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존재하는 지금, 오히려 미국의 북폭가능성이 더 높아졌고 또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국가안보가 더 위태롭게 되어 있다.


또한 내부로는 국론이 분열되고 좌ᆞ우 이념대립으로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더 심해져 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일본을 주적으로 싸우던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 때와는 달리 지금은 민족끼리 이념을 달리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또한 내부는 좌와 우로 이념이 나누어져 더 복잡한 환경에 놓여 있다.


최근들어 자유를 지키려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밤낮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지만 투쟁환경이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새로운 투쟁방식'과 '새로운 전략'으로 구국활동을 준비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의 가치와 이념을 지키기 위하여 여성들은 물론 젊은세대들까지도 구국운동에 많이 동참할 것같다.


반면 이대로 가면, 자유가 박탈되고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독재 사회주의 국가로 갈 가능성이 높다.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 구분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윤희순 여성의병장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윤희순의병장과 같은 투지와 용기있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247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