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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2-08 07: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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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진정되었나 싶더니 변종 오미크론 출현으로 세계가 또 다시 시끄럽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스크 쓰기 의무 해제 및 예방접종 거부 등 정부의 코로나 방역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이 빈번한 곳이 있다. 동양은 보다 강한 방역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국민의 마스크를 벗기고 방역규제 등도 해제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도 국가 통제정책에서 확진자 자율방역으로 정책을 변경하겠다고 한다.


이 같은 정책이 서양처럼 국민들의 자율권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 전파 위험이 낮다는 판단에서 방역정책을 변경한 것인지 향후의 평가가 주목된다. 서양권은 국민의 자율권을 중시하는 정책들이 중심이 되고, 동양권은 국가 통제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어서 방역정책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물리적이나 정신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서부개척시대부터 마스크는 강도와 같은 범법자들이나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 한다. 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녀도 이상스럽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검은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다니면 곧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을 수 있다. 병원에서도 중환자 정도나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나오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미국인은 서부시대 마초의 정신이 있어서 마스크를 쓰는 행위 자체를 “겁쟁이” 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또한 전문가도 마스크를 오랜 시간 쓰고 있으면 건강한 사람들도 호흡기에 좋지도 않고, 흡기가 차면 오히려 비위생적이라며 마스크 쓰는 정책을 무조건 환영하지도 않는다. 서양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정신이 강해서 정부가 마스크 쓰기 운동을 강제한다면 자신의 자율적인 생각과 행동을 바로 표현하지만, 동양에서는 집단적 행동 특성과 순종하는 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의 마스크 쓰기 운동을 잘 지키는 편이다.


동서양에 따라 이처럼 표현하는 행동 특징이 다른 것은 살아가면서 자연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한자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이란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로 외부 영향과 자극이 없어도 자체로 존재하고 생성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이란 현상을 근원적 자연과 대상적 자연으로 구분한다면 동양에서는 근원으로서의 자연관을 가지고 있다.


고대 중국 철학에서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영혼과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만물의 일체가 자연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총체적 개념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어디에도 타율적인 요소는 없으며 신과 자연, 인간과 자연 등을 이중적 구조보다는 일체의 개념으로 보았다.


동양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 고대부터 형성되면서 자연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 그에 대한 동경과 일체화를 바라는 사상을 근대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동양철학에서는 진리보다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길을 뜻하는 도(道)를 추구한다. 도교의 도덕경에서도 삼라만상의 끊임없는 순환을 전제로 하며, 중용의 도(道)를 중요시 하는 유교도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행동을 경계하였는데, 이는 자연현상과 사람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서양은 사물을 그리스어 “physis” 즉 “태어나다, 생기다”라는 생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자연적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스스로 태어나 자라고 쇠약해져서 사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이란 그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영어 nature는 “태어나다”의 “nascor”로부터 따온 “nature” 라는 의미와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렇게 그리스 시대를 열기 직전인 소아시아 시대까지는 모든 자연물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物活論)을 주장해 동양처럼 자연과 인간, 우주 만물을 통합적인 관계로 인식했다.


그러나 로마 그리스도교 이후부터 신(神) 중심의 사고체계로 바뀌면서 인간이 우선하고 다음으로 자연이라는 서열의 관계를 정립하는 사고체제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 철학은 신(神)에 의해 자연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이른바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정립하면서 서서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원론으로 설정하려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 문화(culture)의 개념은 글자의 뜻처럼 어떤 대상을 글(文)로 변환(化)시키려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문화수준이란 본래 의미는 문명의 기기를 어느 정도나 활용하느냐 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서양식 개념이 아니다. 천지인(天地人)의 핵심 원리인 도(道)를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수준, 즉 글로 변화시킨 지식과 인격 수준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동양권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통합”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였고 서양권에서는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분리” 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했다. 원시시대 서양은 대부분 수렵생활을 통해서 먹거리를 해결했는데, 이런 시기에 서양인들은 사냥 장소의 지리환경과 날씨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천지(天地)에 관한 가치관이 많이 발달하게 되었다.


하늘에 대한 경외심은 죽은 후라도 한 번 가보고 싶은 이상적인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런 인식은 자연스럽게 신비주의적 종교 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죽은 후에 갈 곳이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했고,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다. 서양권에서는 종교적으로는 청교도적인 기독교로 시작됐고, 철학적으로는 플라톤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육체와 영혼, 선과 악, 현세와 내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원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려 했다. 또한 철학적으로는 이원론을 상반되는 투쟁의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개념을 인간의 입장에서 이용하고자 투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개척하고 개발하고, 미지의 세계도 침략하고 지배하는 행위를 “문화(culture)”라 정의하면서 자연을 이용하는 행위를 정당화 하려했다.


서양 사상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였던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二元論)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의 영혼은 원래에는 신(神)적인 본성을 가졌었는데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신성(神性)이 훼손되는 위기 상황에 빠졌다고 믿었다. 인간 영혼의 원래 고향은 동굴 밖에 있는 천상의 빛의 세계였는데, 어떤 이유에서 영혼이 천상에서 추락해 현실 세계인 동굴 속으로 유배되어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빨리 육체적 욕망과 감정을 극복해서 천상의 이데아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 사상의 핵심이다. 플라톤은 “인간 최대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며 투쟁을 중시했다.


프랑스의 위고(Victor Hugo)는 인생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싸움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자연과 인간과 싸움이고, 둘째는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기와 자기와의 싸움이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싸움을 그렸다. 작품속의 장 발장(Jean Valjean)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한 자아와 악한 자아의 내적인 투쟁을 그리고 있다. 결국에는 선한 장 발장이 악한 장 발장을 이기는 용감한 정신적인 승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우리의 마음도 선과 악이 서로 싸워야 하는 전쟁의 싸움터라고 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런 두 가지 자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데카르트도 플라톤의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 개념을 이어받아서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주장하였고, 그런 결과 육체와 정신이라는 개념을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미해결 주제의 문제로 남겨 놓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와 투쟁적 가치관은 척박한 지리적인 환경에서 경쟁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된다는 가치관을 갖게 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청교도적인 노동과 근면 의식을 갖게 했고, 자연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미지의 신천지를 탐험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수단이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수단은 현재의 생활환경은 물론이고 미지의 세계까지 무차별로 탐험하게 했고, 이러한 개발 행위를 문화(culture)라 했다.


문화라는 본래의 뜻은 “(밭)을 경작하다, 가꾸다, 신체를 훈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olo에서 유래했다. colo의 형용사는 cultus, 명사는 cultura인데 문화라는 말의 원래의 의미는 “자연을 가꾸어 만든 결과나 그런 행위”를 말한다. 요즘은 마음(영혼, 정신)을 가꾸고 수련하는 활동도 문화의 개념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결국 자연을 인간 편의를 위해 가꾸고 개발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문화라고 한다.


한편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은 농경생활이라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땅은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고마운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연과 현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사망 후 극락세계에 가기보다 현실 세계에서 장수하고 싶어 하는 현실적 긍정적인 가치가 싹트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죽음을 매우 슬퍼한다. 죽음보다 현실을 긍정하는 관계의식 때문에 인간관계를 다루는 인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요약한다면 인간은 삶의 환경과의 관계에서 주체자인 인간들이 관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관점에 따라서 천지인(天地人)을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졌다. 서양인은 천(天)에 대해 동경하는 이상적인 곳으로서 천당은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천당가는 길을 당당하게 생각한다.


지(地)에 대한 관념은 인간을 위해 현재의 환경(地)을 탐험하고 개발할 책임이 있다는 적극적 문화 개념을 갖는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지(地)에 대해서 농경이 적합하고 비옥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여 농사와 관련해 다양하게 감사하는 종교적인 관념이 발달했다. 또한 농사 성과도 하늘이 결정하기 때문에 천지(天地) 관념은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섬기는 다양한 숭배의식과 신앙적 행위가 발달하게 됐다.


동양은 인간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 사상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념을 강한 강철에 비유한다면 동양인들은 부드러운 버드나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일한 자연 현상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이 달라지면 가치관이 달라지고 행동들도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진다. 서양하면 떠오르는 것이 모험 탐험 분리 경쟁 개인 자유 육체 지식 물질 과학 행동 같은 단어이고, 동양하면 조화 화합 집단 전체 통합 관계 정서 인문 정신 양심 인내 같은 단어가 연상된다.


코로나 방역으로 마스크를 쓰는 정책에서도 동서양이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를 자연을 보는 정신적 특성을 기준으로 보아도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들 사회에서도 지금 연령별로 서로 다른 가치관 혼돈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60대 이상 연령층은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30대 이하의 연령층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40~50대 연령층은 상황에 따라서 집단적인 가치관과 개인적인 가치관을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사용하고 있다.


머리로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남아 있지만 가슴으로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혼합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연령에 따라 가치와 행동들이 다르더라도 가치관의 상위 개념인 윤리와 예의라 하는 인격은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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