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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2-02 05: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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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부담스러운 선물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이미 선물의 의미를 잃고 있음이리라. 선물이란 모름지기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오래된 선물 중 수필가 ㅂ선생으로부터 두 권의 책을 선물 받았었다. 하나는 고은(高銀)의 <구도자>이고, 또 하나는 이태준(李泰俊)의 수필집 <무서록(無序錄)>이다.


<무서록>에 대해서는 ㅂ선생께서 쓰셨던 '쌀 한가마니 값과 맞바꾼 수필의 정수'라는 수필을 <책과 인생>이란 잡지에서 읽고 1941년도에 출간되는 바 있는 이태준의 수필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수필을 읽으면서 어떻게든 <무서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이태준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월북 작가라 하여 우리의 입에 오르내릴 수 없던 상당한 기간 동안 더러는 잊혀지고 더러는 언급도 되지 않아 젊은 층들은 아예 모를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나는 1988년 이태준의 <문장 강화>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재출간(1949년 초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자마자 그걸 샀었다. 문장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쉽고 명확하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문장 강화>를 단숨에 읽고나자 이태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발동했지만 분주한 삶의 현장에서 쉽게 그런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김용준의 <근원 수필>이 문고본으로 출간되었을 때도 그걸 단숨에 허기진 듯 숨 가쁘게 읽었고, 곧 다시 서점으로 달려가 20권을 사다가 수필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근원 수필>을 갖고 있지 않은 벗들에게 꼭 읽어보라며 한 권씩 보내 주었었다. 그런 나이니만치 ㅂ선생께서 보내 주신 <무서록>을 받아 들고 내가 얼마나 반가워하고 기뻐했을까는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수필의 내용은 둘째로 치고라도 이태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를 그만큼 기쁘게 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까지 내가 이태준의 작품을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193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소설가라고 하지만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할 자격도 없는지 모른다. 꼭 변명을 하라면 월북 작가라 하여 베풀어졌던 정부적 차원의 배려(?) 덕택이라 해둘까.


여하튼 많은 이들에게 문학 수업의 아침을 열어 주었다는 <문장 강화>의 예찬 앞에서 나는 늘 이태준에 대해 목말라 하다가 1988년에야 <문장강화>와 만나 그에게 빠져 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나 이태준을 다시 만나는 기쁨이 내겐 더욱 유별났었다. 내 성미에 <무서록>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내 서점으로 달려갈 터였지만 그러기도 전에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신 듯 출판되자마자 책을 보내주셔서 그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ㅂ선생이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ㅂ선생의 수필 속에서 어렵사리 <무서록>을 구해 돌아온 후 복사해 달라는 문우의 부탁을 자랑만 실컷 하고 거절하였다는 내용을 상기하면서 그 광경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책을 열었었다.


이태준의 수필에선 인정이 물씬 물씬 풍겨난다. 글감이야 특별할 게 없는 흔하디흔한 일상사요, 대수롭지 않은 우리 주위의 일들인데 읽고 나면, 특히 마지막 결구 부분에선 더러는 따스하고, 어떨 땐 싸아한 아픔이고, 또 어느 땐 시린 느낌까지도 들게 한다. 짧은 수필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들을 무료함이 들 정도로 끌어가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무언가 촉촉이 젖어 들게 하는 마력, 이태준의 수필엔 편 편 마다 그런 마력이 있었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가을비답지 않게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였다. 그래선지 천둥 번개 속에 쏟아지는 비는 갑자기 빗살이 굵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멈출 듯 여리고 가늘어지기도 하여 마치 연주회장에서 연주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가을비는 마음도 젖게 하는 것 같다. 비를 직접 맞지 않더라도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젖게 하는 것이 가을비인가 보다. 많이 차갑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한기를 느끼게 하며, 선명하지 않으나 분명한 변화가 눈에 아른아른 다가오는 모습이 느껴지고 보이게 하는 가을비는 그래서 조금씩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도 하는 것 같다.


불빛 속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태준의 수필이 그 가을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들떠 있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아 있지도 않은, 늘 만나는 평범한 같으면서도 새록새록 반가움을 일게 하는 그의 마무리가 좋았다. 그는 기질에 맞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상식 혹은 개면 이상의 창조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고, 감정은 문학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을비 속에서 그의 수필을 떠올렸던 것일까.


차가운 것 같지 않으면서도 한기를 느끼게 하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날씨인데도 천둥 번개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비 내리는 가을날처럼 이태준의 수필에선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가닥들이 펜 끝에서 길들여지고 잠재워지고 일어나곤 했다. 그의 수필 <수목>(樹木)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하룻밤 세우(細雨)만 내려 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 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 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 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


가만히 읽어만 내려가도 내가 미처 느낄 수 없을 가녀린 설레임을 만질 수가 있다. 요즘처럼 수필집이 많이 출간되는 때, 수없이 우송되는 그 많은 수필집을 대하면서 나는 늘 풍요 속의 빈곤을 느꼈다. 그런 때에 찾아와 준 이태준의 <무서록>은 그의 수필 봄비 같은 촉촉함으로 나를 설레게 했었다.


그렇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때 삼라만상이 때 맞춰 내린 가을비에 몸을 풀듯, 인간의 삶도 이렇게 신선하고 조그만 변화만 있어 주어도 훨씬 윤기 나고 향기 나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금년 나의 가을도 그런 윤기 나고 향기 나는 삶으로 욕심을 내어 가꿔 보고 싶어진다. 아주 작은 징후 앞에서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행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즐거워지는 법인데, 지금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시지만 그 때 보내주셨던 ㅂ선생님의 사랑과 배려의 선물 이태준의 <무서록>은 지금도 그때의 마음으로 마냥 즐거운 문학의 나들이 길로 인도하는 것 같다.


남들이 이런 나를 보면 웃을는지도 모르나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보람있으니 어쩌랴. ㅂ선생님의 따스한 배려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것도 가을의 설레임일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냥 즐거워지는 내 마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저만치서 ㅂ선생님이 책 선물을 들고 저만치서 걸어오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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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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