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3-12-01 12:30:46
기사수정


▲ [사진=Why Times]


이모는 내 인생의 첫 멘토다. 유년기에 그 분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접했고, 동화 읽기, 화음 넣어 노래하기, 동시 쓰기, 연극 관람과 같은 예능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모는 학창시절 명문고등학교에서 합창 지휘, 연극, 봉사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낸 재원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했고, 사남매를 키우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지만 고상한 꿈과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하늘나라에 가셨다.


이모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과 연락이 뜸해지더니 결국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이모가 워낙 성품과 재능이 남다른 분이라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들딸을 잘 키웠으리라 미루어 짐작하지만 이모의 자녀 사남매가 어떻게 사는지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늘 조카들이 눈에 밟혀 안타까워하며 찾아다녔던 외삼촌이 동생에게 한 번 찾아보라고 부탁했는데 불과 하루 만에 이모의 장남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무려 이십 년 만의 일이라 온 가족이 흥분했다.


즉시 단체 카톡방을 만들고 두 외삼촌, 미국에 사는 막내 이모와 그 분들의 자녀인 사촌들이 속속 초대되어 16명이 한 방에 모였다.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 각 지역, 홍콩, 독일에 사는 동생들도 동참하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그 중심에 이모에 대한 추억이 있었고 그 분의 삶과 재능에 대한 단상들을 돌아가며 하나씩 풀어놓았다. 기대한대로 이모의 예술적 재능을 자녀들이 물려받았고 그 분야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카톡방을 개설하고 나니 85세의 어머니, 칠순과 팔순이 가까운 외삼촌들이 함께 글을 읽고 올리셨다. 30대부터 80대까지의 혈육이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NS의 위력을 실감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대와 시공간을 뛰어넘으며 실시간으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드디어 초연결망의 시대가 왔다. 이미 친가 쪽으로도 사촌들이 페이스북에 그룹을 만들어 소식을 나누고 있지만 연락이 끊어졌던 가족을 만나고 기억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시간여행은 특별히 흥미로웠다. 글 외에 사진을 보며 서로 닮은 모습을 찾아내는 것도 혈육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집에 사는 식구끼리도 함께 밥 먹을 시간이 없는 시대에 SNS에서 친척을 찾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이종사촌 동생도 본인들만 알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해 소상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고 했다. 한 사람의 삶이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돌아가신지 20년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모가 나에게 ‘빨간머리 앤’과 ‘작은아씨들’을 소리 내서 읽어주고 ‘소공녀’와 ‘알프스의 소녀’를 실감나게 구연해서 들려주지 않았다면, 영화 ‘포켓에 가득 찬 행복’을 재구성하여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소프라노와 알토로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어스름 해지는 시간 연극 공연과 교회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어머니에게 야단맞고 시무룩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눈이 예쁘구나. 눈을 보면 마음을 알 수 있단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친구들이 해주는 소박한 화장을 하고 여윈 얼굴로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옆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종종 친정에 찾아오는 슬픈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독한 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목소리가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만날 때 내 생애 최초의 명함을 만들어주며 ‘너다운 모습으로 달란트를 발휘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내가 이모를 잊었을까.


가을 깊어가는 계절, 20년 만에 모든 형제자매, 자녀와 조카들 모두가 한결같이 보고 싶어 하는 분이 불현 듯 다가와 아름다운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했다. 이번 'SNS 이산가족 만남'으로 삼촌, 사촌, 오촌 간에 닮은 모습과 소질들을 보며 역시 가족의 동질성과 삶의 양식은 생물학적 유전자Gene와 함께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 시절 이모의 순전하고 이상적인 모습이 거친 세태 속에서 마냥 유약해 보였지만 결국은 가장 강인하게 살아남아 우리 안에서 연결, 복제, 확장되어 퍼져 나가는 유전자가 되었다. 이모가 비록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고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지만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두고두고 꺼내 읽는 사람책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700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