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3-06-13 10:24:26
기사수정


▲ [사진=Why Times]


사람은 장수하면 백 년을 살고, 나무는 살아남으면 천 년도 산다. 올해는 큰 나무 같은 스승 월당 조경희 선생님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님은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식민지 시절에도 꾸준히 한글로 수필을 쓰신 분이다. 그 분이 남긴 10권의 수필집은 소탈한 일상의 지혜와 예리한 사회의식을 고루 담고 있다. 호방한 성품과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유쾌하게 하셨던 분이고 문학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과 언론ㆍ정치 분야에까지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분이다. 2005년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1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양한 에피소드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분이다.


지난 5월 19일에는 제11회 조경희수필문학상 시상식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함께 열렸다. 문인과 축하객들이 자리를 꽉 채운 가운데 나는 조경희 선생님의 수필 <작은 성당>을 낭독했다. 고향 강화에서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성당이 얼마나 영혼의 포근한 안식처가 되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 담백한 문체로 쓴 작품이다. 화려하거나 현학적인 문장은 없으나 겸손하고 꾸밈없는 신앙심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우리 마을에 이 작은 성당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곳을 더듬고 다닐 것인가. 내 주 예수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망망대해의 풍랑에 밀려 떠도는 조각배처럼 삶의 방황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을 것이 아닌가.’


조경희 선생님과는 여러 장면의 추억이 있다. 1986년 초회 추천을 받을 때, 선배들 중에 ‘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있으니 필명을 쓰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진화(眞和)’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도 조경희 선생님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이번 문학상 시상식에서 마침 한자까지 나의 본명과 똑같은 원로 수필가 이경희(李京姬) 선생님도 뵙고, 30년 간 <주부편지> 발간에 동행했던 소설가 정연희 선생님과 문단의 여러 선배들께 인사를 드렸다.


문득 조경희 선생님이 오셨던 나의 첫 수필집 출판기념회와 여러 번의 동인지 출판기념회, 1998년에 열린 뱃길로 북한까지 들어갔던 금강산 여행길이 생각난다. 그때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금강산 등반길에서 젊은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으셨는데, 2003년 가을 고양시에서 열린 시수필낭송회에 오셨을 때는 다소 초췌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힘이 있고 낭랑해서 넉넉히 백수를 누리시리라 기대를 했었다.


글을 쓸 때는 지나치게 사사로운 신변잡기로 개인사만 다루는 것을 경계하라 하셨지만 실생활에서는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을 중요하게 강조하며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나를 격려해 주셨다. 작가, 기자생활을 거쳐 장관까지 많은 사회활동을 하신 분의 말씀으로는 의외라 느껴지지만 실제로 사부님의 아침상을 대부분 손수 차리셨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피부에 화장이 잘 받게 하려면 시간을 두고 한 가지씩 바르는 사이에 뜸을 들여야 한다고 고운 피부의 비결을 알려주셨다. 


요즘 같은 외화내빈의 시대에 소박한 철학에 예리한 작가정신, 레이저 같은 직관력에 넓은 아량, 수수한 외모에 반전 매력을 가진 분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필력뿐 아니라 해박하고 거침없는 달변이 월당 선생님의 최대 강점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또 한 분의 멘토인 정연희 선생님의 유려한 연설도 문단에서 으뜸이라도 할 수 있다. 글이든 말이든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기에 그릇 안에 얼마나 귀한 보배가 있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거대한 나무와 같이 천 년을 가는 큰 스승은 사람을 키우는 분이다. 월당 조경희 선생님은 800여 명의 수필가를 키워내셨고, 그 중에 나는 300번째쯤 되는 제자다. 그 분에게서 배우는 것은 뿌리 깊은 믿음과 솔직담백한 성품, 시대와 현상을 꿰뚫어보는 작가정신, 때에 알맞은 말과 용기 있는 행동이다. 수백 명의 제자들이 그와 같은 문화유전자를 물려받아 오늘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 조경희수필문학상 시상식에서 젊은 문학평론가(박진영 교수)가 1세기 전에 태어났지만 이미 타계하여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다섯 갈래의 길’을 찾은 것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가 43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미국 유타주의 사시나무숲처럼 우리는 모두 정서적인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고, 사람나무 역시 식물나무처럼 천 년을 살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내게는 월당 조경희 선생님이 그렇게 거대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나무이다.

(이글은 2018년에 쓴 글입니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524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