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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6-02 05: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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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한복음 8장 3절에서 9절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씀을 하겠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자,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성경 말씀으로 보면 이 사회는 정말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회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의 언론 보도를 보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나 국정감사 또는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출두하여 답변하는 진술들을 언론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 양심은 집에 두고 온 사람처럼 보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슬픔을 넘어 서글픈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그들 대부분이 법적 문제는 전혀 없다며 당당히 맞서고 있다. 여러 증거들을 제시해도 오리발이고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되면 그런 것이 범법이 되는 줄 몰랐다며 입 바른 씁쓸한 사과 한 마디 하면 끝이 난다. 우리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과 같이 이런 코미디 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 태도다. 이제 일반 국민도 오염되어 이러한 태도에 익숙해져 사회 어느 곳이나 일반화 되어버린 느낌이다.


사회 일반에 퍼져 있는 가치관은 어떻게 해서든지 법 조항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법대로 하라는 식이다. 법에 걸리면 그러한 법이 있는지 몰랐다거나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끝이고, 법에 안 걸리면 당당해지는 사회다. 우리의 사회는 이미 양심보다 법이 모든 것을 통제 관리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너도 나도 법조인이 되려고 고시촌과 법학 관련 전문대학원은 초만원이다. 이러다 법조인이 넘쳐나 그들이 골목을 누비면서 “소송이나 이혼합시다”라고 소리치며 호객을 하는 세상이 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법은 서양의 계약 사회의 부산물이다. 악법도 법이니까 법은 지켜야 한다며 70세의 나이로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생각이 난다. 자신의 양심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죽음의 형벌을 당당히 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기원전 399년에 권력을 쥔 사람과 유죄를 주장하는 아테네 시민들이 합세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 국가의 신에게 불경스러웠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500인으로 이루어진 평의회에서 280:220으로 유죄의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이어진 선고 형량 투표에서는 360:140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는 친구들의 탈출 제안도 단호히 거절한다. 평생 다른 사람에게 법을 지키라고 주장하였던 자신이 스스로 법을 어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의 양심이라고 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기준만을 믿었지만, 타율에 의한 형식적 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법 위에 양심과 윤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타율적인 법에만 의존하는 사회로 변했다.


우리 다 같이 다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한 번 상상해 보기로 하겠다. 어느 시골에서 어떤 부인이 불치병인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부인을 살릴 수 있는 약은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이 약은 같은 도시에 사는 어느 약제사가 발명한 일종의 특효약이었다. 이 약은 재료 원가가 비싸기도 했지만, 약제사는 약값을 원가보다 10배나 더 높은 2,000만 원으로 정했다. 아픈 부인의 남편은 돈을 구하기 위해서 아는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녔지만 약값의 절반인 1,000만 원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남편은 약제사에게 내 부인이 죽기 직전이라는 사정을 설명하고는 약을 싸게 팔거나 외상으로라도 팔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약제사는 단호히 거절한다. 이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일생의 공을 쏟았고, 이제 이 약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 절망한 남편은 마침내 약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약을 훔쳤다.


남편은 과연 약을 훔쳐야 했는가? 절도는 옳은 것인가? 남편의 의무는 무엇인가? 좋은 남편이라고 한다면 약을 훔쳤을 것인가? 가격 책정에는 법적 규정이 없었지만 원가의 10배 가격은 타당한 것인가?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 심리학자 콜버그(Kohlberg)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근거로 도덕성(가치관)이 발달하는 수준을 크게 3가지 수준, 작게는 7가지 단계로 요약 한다.


제1수준은 4~10세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수준으로 이를 전도덕성 수준이라 부른다.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은 있지만, 선과 악을 권위자의 힘이나 욕구와 관련시켜 해석한다. 즉 외부 보상이나 처벌에 근거하여 판단하는데, 세부적으로는 다시 두 단계로 나눈다.


제 1단계 : 타율적인 도덕 단계로 쾌락/고통 지향적이거나 벌/복종 지향적 수준이다. 권위자의 처벌을 피하면서 권위에는 복종하는 단계로 대체로 3~7세 아동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제 2단계 : 개인주의적인 단계로 비용-소득 지향적인 수준이다. 모든 행동의 기준이 자신의 욕구를 먼저 내세운다. 내가 남들에게 친절하면 남도 당연하게 나에게도 친절해야 한다는 순진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주로 8~12세 경에 나타나는 행동이다.


제 2수준은 인습적이고 타율적인 도덕성 수준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 설정한 기대나 기준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기면서 그 사회 질서에 동조하려고 힘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려 한다. 이 수준도 두 가지 단계로 세분된다.


제 3단계 : 대인간 기대 관계에서 보이는 착한 아이 지향적 수준이다. 대체로 12~17세 정도에 나타나는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고려하려는 행동이 나타난다. 이들에게 옳은 행동이란 타인을 기쁘게 하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나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려고 노력한다.


제 4단계 : 사회적 시스템에 의한 법과 질서 지향적 수준이다. 대체로 18~25세에 나타난다.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사회에서 개인적인 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기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의지가 곧 정의라 생각하며, 자신의 가치를 사회가치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권리에 대한 예리한 감각은 없다. 큰 흐름에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보며 아직은 소수자에 주목하지 않는다.


제 3수준은 후인습적인 수준으로 자율적 도덕성을 강조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적인 원리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과는 별개임을 깨달으면서 개인의 양심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도덕적 가치를 완전히 내면화하기 때문에 외부 판단기준은 필요 없다. 다시 세 가지 단계로 세분해 설명할 수 있다.


제 5단계 : 개인의 권리 및 사회적 계약 단계로 사회적인 접촉지향적인 수준이다. 인간의 기본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이 단계에 속하는 개인은 세상에는 더 다양한 의견과 권리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와 같이 다양한 의견은 그런 것이 기본적인 인간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로 25세 이상이면 나타날 수 있다.


제 6단계 : 보편적인 윤리의 원칙 지향적 단계다. 법이나 관습 이전에 인간 생명이 관여되어 있는 문제로 생명의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다. 스스로 선택하는 도덕 원리와 양심의 결단에 따른다. 이 단계의 도덕적 사고를 표현하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제 7단계 : 우주적 영생을 지향한 수준으로 도덕이나 삶 자체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우주 질서의 통합을 의도한다. 예수, 간디, 마틴 루터 킹, 공자, 소크라테스, 칸트, 테레사 등의 위대한 도덕가나 종교 지도자, 철인의 목표가 우주적임을 알 수 있다.


언론에 등장하는 고위 공직자가 지적인 수준이 높아서 비록 사회적 지위는 높을지 몰라도 세상을 사는 이해력과 도덕적 가치판단의 수준은 예상보다 상당히 낮은 현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이들의 도덕수준은 겨우 2~3단계의 청소년 단계에 머물러 있고, 높다 하더라도 겨우 사회적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4단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의 낮은 도덕 수준에 놀라울 뿐이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는 이른바 “법 기술자” 같다. 청문회가 양심과 도덕 수준에 관계없이 법에 저촉된 것만을 다룬다면 굳이 청문회라는 보여주기 쇼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경찰의 범죄기록 증명서를 논의하면 되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법 위에 있는 도덕과 양심의 문제까지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양심의 문제는 치외법권적 면책 특권이 있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언행과 도덕 윤리적 문제는 국민이 따르고 모방하는 중요 학습 모델이 되기 때문에 법적 문제보다 더 위에 있는 도덕과 양심의 문제까지 검증 받을 당위성이 있다.


우연히  국제결혼을 중매해 주는 중매쟁이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그들의 대화 내용이 나의 귓가에서 맴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돈만 탐낸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나는 당당하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젊은 여성들은 돈만 탐내고, 결혼한 젊은이는 돈만 벌고,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는 법만 피하며 아빠 찬스와 엄마 찬스만 노리고, 출세한 정치계의 양반(?)들은 권력 찬스만 노리고, 돈이나 빽도 없는 청년들은 한탕 찬스만 노리는 사회가 아닌지 걱정스럽다. 윤리와 도덕과 양심이 다시 살아나야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절박한 느낌이 든다. 비록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올랐지만 도덕과 윤리 의식은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들이다.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도덕과 윤리와 양심의 주제를 필수과목으로 교육시켜야 하고 사회에서도 양심과 윤리가 성공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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