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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4-20 15: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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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T DB]


불의와 부정에 한거한다고 4.19혁명의 대열에 끼여 시위에 앞장섰던 일도 이제 58년전의 과거이야기가 되었다.

 4.19단체에 관여하고 있는 몇 몇 친구가 2018년 4월 17일 서울 시청 앞에서 모여 58년 전의 그날을 회상하면서 시청 앞에서 광화문까지 시위하는 행사를 갖자면서 꼭 참여해달로 부탁을 해왔다.


전화만이 아니라 카톡으로, 문자메시지로 쉴 새 없이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고향에서 친구들도 오기로 했다면서 친구도 만날 겸 동참해달라는 연락이었다.


친구의 요청에 못 이겨 글 쓰던 일을 멈추고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마이크 소리가 나는 곳에는 사람들이 20여명 웅성웅성 대고 있었고 간이의자를 놓고 200여명이 자리에 앉아  마이크 소리가 나오는 본부석 텐트를 바로보고 있었다.

본부석 무대에서는 소년무용단들이 사전행사로 전자음악에 맞춰 무용극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텐트 앞에 서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앞줄로 나갔다가 소스라치게 놀았다.

항상 노인들이 웅성거리는 파고다공원의 놀이터가 시청 쪽으로 이동해 와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이의자를 채우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평균 80대의 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20대에 4.19시위에 참석했던 젊은 사자들이 4.19혁명 58주년이 된 지금은 모두 80대가 된 것이다.


그분들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읽었다.

나만 못 느끼고 있을 뿐 내모습도 파고다 공원에서 소일하는 바로 그 노인의 모습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그 자리에 더 이상 서있고 싶지 않았다.

바로 저 수많은 늙은 군중속의 한 사람으로 나를 분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앉아있는 분들은  옛날 그때를 생각하고 나오셔서 그런지 모두 옷차림들이 깨끗했다.

모자나 반 중절모자를 썼거나 백발 그대로를 나부끼면서 앉아있는 분들이 하나같이 말쑥했다.


세월은 지났어도 이제는 옛 애인의 희미한 그림자처럼 되어버린 4.19이지만 젊었을 때의 그날을 생각하면서 마음먹고 4.19의 거리로 나들이를 나온 때문일 것이다.


▲ [WT DB]


나는 가까운 친구하나를 더불고 프레스센터 지하실의 한방 찻집으로 들어와서 차를 나눈다.

1960년 4월 당시의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의사당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까지로 이어지는 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릴 때는 갑자기 젊은 기운이 솟구친다.


곧 독재정권의 총구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목숨이 나라갈 줄도 모른 채 힘차게 구호를 외치면서 달렸던 그날의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젠 늙거나 낡아 버리고 있는 우리 당시 세대의 모습으로 생각이 옮아지면서 나의 늙음이 뭔가 깊은 슬픔으로 변해버린다.


아! 4.19는 이제 옛날이야기다.

어쩌면 19세기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일어난 시점은 1960년대였지만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공간은 19세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불의와 부정과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에게 시민들은 환호했고 최루탄에 눈물 흘리면 물수건을 빨아 눈자위를 닦아주던 시민들도 많았지만 이제 혁명현장의 그 주인공들은 다 고인이 되었거나 파고다 공원의 한 귀퉁이에 모여 앉자 공짜 지하철을 타고 어디선가 무료로 나눠준다는 점심정보를 따라 이동하는 군상들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은 불의(不義)에는 둔감하지만 불리(不利)에는 기를 쓰고 달려드는 반면 한국인들은 불리에는 둔감하지만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뛰어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사람들도 중국인들처럼 변해버린 것 같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만들고 뿌리고 수용하는 젊은이들 속에서 4.19적 리얼리즘은 찾기 힘들다.


지금부터 58년 전 4.19에는 전 국민이 참여했다.

전 국민의 목소리가 하나였다.

전 지역이 같은 주장, 같은 목소리로 참여했다.


새벽에 닭이 울듯이 대한민국 전역의 국민들이 새벽 닭 같이 한 소리로 울었다.

이것이 마이네커의 이른바 1789년의 위대한 정신을 능가하는 1960년의 위대한 한국정신이었다.


혹자는 부마사태나 5.18의 광주를 예찬하고 촛불을 혁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4.19가 받는 위대한 정신에 비교될 수 없다.

그것은 특정지역이나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매스컴과 제휴한 대중선동조작으로 상당수의 국민들을 일시적으로 정치적 문맹(Political Illiteracy)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광우병파동이 그렇고 촛불파동도 정변으로 변한 그러한 현상의 일종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19 역시 본질은 19세기적이었다.

부정, 부패, 독재가 청산되면 대한민국이 19세기적 과업이었던 국민국가로 변하고 우리의 위대한 정신이 3.8도선을 넘어가 북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1인의 자유는 있지만 만인의 자유가 부정되는 북한 지역 동포들까지 주권자의 지위를 얻게 하면 민족국가의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4.19이후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학생들이 통일의 주도세력이 되자는 취지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낭만적 통일운동은 5.16군사혁명재판의 철퇴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4.19가 58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4.19당시 세대들의 생각은 19세기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 세대들은 21세기적 지향을 내 보인다.

모두 공리적이다.

전교조에게 자녀교육을 맡기기 싫으면 유학 보내면 된다.

교육의 국경이 사라진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노조 때문에 기업하기 어려우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다.

경제적 국경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화의 국경이 사라진지는 오래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에 살아야 한다는 것만큼 낡은 생각도 없다고 한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처럼 허구는 없다.

독재하고 싶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19세기형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여러 민족이 뭉쳐 하나의 국가, 법질서를 만들고 그 나라의 국기 앞에 충성을 선서하면서 부정 없는 공정선거로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는 나라들이 모두 건강하고 국제협력에도 더 크게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4.19의 메시지를 21세기의 요구에 맞도록 갱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업은 평균 80대의 노인들에게만 맡기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이는 사람을 늙게 만들면서도 낡게 만들기 때문이다.


올해 4.19 58주년만큼 많은 생각의 숙제를 주는 기념일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김정은도 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함께 들고 나올 체제보장도 19세기형이 아닌 21세기의 요구에 맞도록 고쳐서 가지고 나와 남북정상회담에서 뭔가 진전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어제 하루를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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