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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07 22:45:33
  • 수정 2022-07-07 22: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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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던 퇴직교수인데 심리학은 지극히 과학적 논리만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서양학문이다. 과학적 명제에 부합되지 않으면 더 이상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지식과 같은 논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좌반구와 감성과 같은 비논리를 담당하는 우반구 등 좌우반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심리학은 우반구 기능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오로지 좌반구가 관리하는 이성, 논리, 합리와 같은 좌반구 관련 행동에만 관심이 있다.


인간의 최종 행동은 좌우반구의 균형 있는 통합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 데 좌반구 인간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우반구 성향이 강한 동양문화권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한계점을 드러낸다. 나는 강의와 연구를 하면서 이런 한계점에 대해 늘 의문점을 가졌고, 그 원인이 우반구가 담당하는 감성이나 감정 등 비논리적 기능을 심리학이 간과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서양 심리학이 잃어버린 우반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동양심리학(?)의 원류라 생각했던 중국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서양의 좌반구식 사고가 모든 학문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동양문화는 상당히 무시되었다. 그러므로 동양문화의 원류라 생각되는 공자사상은 크게 비판을 받는 시기였다. 서점가에는 공자는 죽었다, 공자가 죽어야 산다라는 책이 진열되어 많은 독자를 늘리고 있을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방의 모 대학원 유교학과에 입학하여 동양심리학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때 대학가는 소위 운동권 학생과 몇몇 운동권 교수들이 반정부 서명을 하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한편 소련이 해체되어 여러 동구권 국가들이 독립을 하였고, 중국은 서방에 국교를 열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는 등 전 세계의 사회주의 이념이 크게 흔들리는 시기였다. 이에 발맞추어 정부에서는 학생지도 차원에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구권 국가와 중국을 견학시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했었다. 나는 요행히 중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홍콩에서 중국 비자를 받아 전국에서 선발된 30여 명의 교수들이 북경 행 비행기에 올랐다. 난생 처음 중국 민항기를 탔는데 너덜너덜한 실내장식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무줄로 묶어 놓았고, 비행기 안에는 중국 특유의 역겨운 고수(香菜)의 향이 코를 찔렀다. 북경 비행장에 착륙할 때 열려진 창문을 통해 수십 대의 중국군 전투기를 지켜보며 야릇한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우리 시찰단은 북경 근교 농가를 안내 받았는데 농한기에 농민들이 가내 수공업 형태로 부수입을 올린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동네 집집마다 유선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어느 주민에게 전화가 오면 그 스피커를 통해 전화를 받으라고 연락한다며 이런 최신식 농가의 발전된 모습을 열심히 선전하던 기억이 난다.


호텔에 들어서니 전에 소개 받았던 연변대 교수라는 분이 부인과 함께 우리를 찾아와서 달러를 인민폐로 바꾸란다. 우리 일행이 각각 1,000 달러씩 바꾸면 1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이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교수단 총무였던 나는 회장과 상의하여 조선족 교수를 돕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몇몇 교수는 관광지에서 뜨내기 환전상에게서 환전했는데 모두 사기를 당하는 수모를 경험했다. 대만 돈으로 환전을 하거나, 환전상의 손놀림 마술에 속아 많은 손해를 보았다.


우리 일행은 북경 일정을 마치고 시안(西安)으로 가기 위해 북경 공항으로 이동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탑승하라는 신호가 없었는데 가이드 말이 탑승 인원이 적어서 이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통수단은 며칠이 걸려도 좌석이 차야 출발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날 좌석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참 후 가이드가 탑승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이드는 일정상 오늘 꼭 시안에 가야 하므로 비상수단을 써서 중국군 수송기를 빌렸다고 한다. 권력이 있거나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될 수 있다며 자기도 돈으로 해결했다며 군비행기를 빌린 무용담을 자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과의 인연은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마침 나에게 안식년을 활용할 기회가 왔다. 나는 주저 없이 중국으로 가기를 희망했고, 지인의 소개로 심양에 있는 요녕대학에서 1년간 안식년 휴가를 쓰기로 했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였지만 유학에 대한 연구를 폭넓게 하고 싶었다. 요녕대학 구내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현관문으로 나왔는데 마침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바로 옆에서 한 노동자가 변전기 외벽에 시멘트를 덧칠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무심코 그 광경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멘트를 바르면 바로 무너지는 데 시멘트공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일을 해나갔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종업원에게 비가 오는 데도 시멘트공이 왜 계속 작업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팀장이 작업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아서 계속 일을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선 대화가 되는 조선족 교수를 찾았는데 다행히 철학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주말에 시내 관광을 위해 공원에 가보고 싶어서 방법을 상의하니 심양시내 지도를 한 장 주면서 관광하고 돌아올 때 택시 기사에게 료따(辽大)”라고 말하면 학교까지 데려다 줄 거라고 했다. 나는 관광을 마치고 택시를 불러 료따라고 말하니 기사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가더니 도착했다고 하는 데 알 수 없는 시내 한 복판이었다. 한 참을 수소문하여 조선족 교수와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기사는 내가 외국인이라료따하면 당연히 요녕 호텔 (료닝따쌰 : 辽宁大夏)로 이해하지 요녕대학(료닝따샤 : 辽宁大学)으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나의 짧은 중국어 실력에 실망했다.


철학과 교수에게 유학과 관련된 공자 사상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곤란하다고 했다. 중국은 공자 사상을 배척하기 때문에 공자를 연구하거나 강의하는 사람은 없다며 앞으로 공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중국에서는 유학을 접할 수 없었으며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공자의 장손도 대만으로 피신하여 살고 있으며, 잘 알려진 공부가주(孔府家酒)가 공씨 집안의 가용주(家用酒)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간간이 운동장에 나와 조깅을 했는데, 그럴 때면 교수와 그 가족들(교수 아파트는 거의 모두 교내에 있었음)이 운동장으로 나와 내가 뛰는 것이 신기한 듯 어떤 교수는 그렇게 뛰면 바로 배가 꺼질 텐데 뭐 하러 그렇게 뛰느냐며 나의 뜀뛰기 운동을 말리는 교수도 있었다.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도 내려가 감기로 병원을 찾기도 했는데 병원 의사의 옷차림이 꽤 남루했다. 의사도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박봉에 시달려서 교사와 교수, 그리고 의사들은 퇴근 후에도 가이드나 택시운전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수입을 올리며 살 때였다. 감기에 걸리면 보통 링거주사를 맞는데, 링거 수액, , 바늘 등을 따로 구입해야 하고, 병원에서 맞을 것인지 집에 갔다가 다시 병원에 올 것인지에 따라서도 병원비가 달랐다.


한 번은 이런 일도 경험했다. 의사들은 급여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환자를 병원 밖에서 진료하고 사적으로 비용을 챙기는 경우가 있다. 나는 당뇨로 고생하고 있던 터라 조선족 교수의 소개로 병원 밖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특허를 낸 한방약을 소개했는데, 약 값이 비쌀 뿐 아니라 약효에도 의심이 갔다. 그래서 나는 의사에게 약효를 확실히 알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묘안을 냈다. 지금 혈당을 측정하고, 처방해 준 약을 일정 기간 먹은 후 다시 혈당을 측정하여 약효가 입증되면, 제시한 약 값의 10배를 지불하겠다. 그러나 지금 약효를 신뢰할 수 없으니 권고한 기간 동안의 약을 그냥 달라고 했더니 결국 의사는 가지고 온 한방약을 도로 가지고 갔다.


20여 명이 되는 조선족 교수들과도 친분을 쌓기 위해 매주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식비는 월말에 내가 계산 한다고 했다. 지금 기억으로 매 월말에 계산했던 금액이 인민폐로 1,500~2,000 위안 정도였는데 당시 초등교사의 월급이 월 200 위안이 안 되었던 시절이라 비교적 비싼 편이었지만, 나로서는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한국 돈 70,000원이면 100 달러를 바꿀 수 있었고, 100 달러로 인민폐 1,200 위안을 환전할 수 있었으니,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면 충분했다.


당시 중국에서 외국인은 태환권(외국환)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은행에서 환전하면 인민폐가 아닌 태환권을 비싸게 환전했기 때문에 주로 암시장을 이용했다. 외국인은 모든 계산을 태환권으로 해야 했고, 가격도 중국인에 비해 2~3배 더 비쌌다. 예를 들면 외국인 혼자 식당에서 냉면을 먹고 외국인 가격으로 태환권을 사용하는 경우, 중국인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둘이 냉면을 먹고 인민폐로 계산하는 것이 훨씬 쌌기 때문에, 나 혼자 밥을 먹게 되더라도 식당 앞을 지나가는 안면도 없는 중국인에게 함께 먹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대학 총장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는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함께 식사도 하고 술집도 같이 다녔다. 그런데 매번 나를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 상식으로는 총장이 식사나 술을 마실 때면 기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차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총장은 흥과 분위기를 타는 기질이 있어 취기가 오르면 식당 종업원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놀기를 좋아하는데, 항상 기사도 총장과 자리를 함께 했다. 식사하는 자리에 처음부터 동석하고 함께 즐기며 같이 논다. 우리 문화와는 너무 달랐다.


당시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할 초기여서 국영 식당에서 식권을 내고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개인이 경영하는 개인 식당도 있었는데, 신기한 해프닝도 있었다. 가끔 조선족이 개업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어떤 손님이 냉면을 먹고 좀 짜다고 하면 주인이 응수하는 말이 참 신기하게 들렸다. 우리 집 식당의 냉면이 짜면 다음에 오지 않으면 되지 왜 냉면이 짜니 싱거우니 시비를 거느냐고 화를 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심양에 1년간 체류하면서 유학이나 공자 사상을 연구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마치 시간을 되돌려 놓고 과거 시대를 살면서 신기하고 희한한 많은 경험을 하고 귀국했다. 그런 후 중국에서도 유학을 비롯한 공자와 같은 사상가를 복권시켰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시간이 될 때마다 중국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지금도 여전히 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식 중심의 메마른 서양문화보다는 감성 중심의 정이 깊은 동양문화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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