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3-23 11:39:17
기사수정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중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31세에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다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렸다가 이토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침략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손에서 끝나는 구나" 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 지체없이 이토를 척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


이때 큰 도움을 준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 주었고, 집계회계원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했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갔다


그 이후 유동하, 조도선등이 합류했다

만주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 두곳에서 거사를 추진키로했다


열차가 정착하는 전략요지인 채가구역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키로 했다

두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기로 했다


그러던중 유동하로부터 10월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의사는 10월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준비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에 있는 모든 여인숙을 러시아 경비병들이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기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의사는 10월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들어가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오전 9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환영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안에서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30분경 러시아 의장대 사열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귀빈열차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브라우닝 권총으로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4발을 쏴 3발은 이토에게 명중,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의 오른 팔을 맞혔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해 3발을 더 쐈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 모리타이지로와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세이타로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격으로 중경상을 입었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것이지 안중근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것이 아님을 밝혔다


당시 러시아군에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대한만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했다


그리하여 한국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의사는 죽음으로서 순국한 독립운동사의 시조가 되었다


사형선고와 순국


거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뤄순에 있던 일본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여기서 1910년 2월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무려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 라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했다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재판장 마나베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죽음을 앞둔 몇일전 안정근ᆞ안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하지 말라ᆢ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하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유언하였다


철없는 우리 젊은 이들이 "발란타인데이"(초코레트를 사서 선물하는날)로 알고 있는 그 날이 바로 안의사의 사형선고일이다


"사형이 선고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뤄순 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것이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하면서,  이것을 끝낼때까지만이라도 사형집행을 연기해 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의사는 1910년3월26일 오전 10시 뤄순 감옥의 형장에서 만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안의사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안중근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안의사의 태어난 환경


1879.9.2일 태어나 1910.3.26일 순국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 천주교세례명은 토마스(도마)였다


고려말 대유학자인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 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다

부친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부인 조마리아와 결혼, 3남2녀를 두었다 의사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는 8세때부터 조부밑에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은 한치앞을 내다 볼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제적인 감각과 정보에 어두웠고 내각은 물론 국민들 모두가 설마설마 하면서 안일하게 대처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전쟁, 1896년 아관파천,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11월 을사늑약체결, 1907년2월 국채보상운동, 7월 고종황제 강제폐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이미 사실상 식민지화 되었다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등 신민회 사람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향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 전략으로 바꿔갔다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다


김두성이 총독,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도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이었던 의사가 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명 정도로 두만강부근의 노령을 근거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08년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부대를 급습했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범도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고 10여명의 일본군과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에 따라 그리고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 정신에 따라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삿고, 석방된 포로들에 의하여 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를 격고 죄절감에 빠져있었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등을 맡아 활동했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잘라 피로서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사실 조선이 1910년 한일합병 되었다지만 1876년 강화도 수호조약에서 시작하여,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1907년 사법권 박탈과 군대해산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1910년은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최종 완성된 해였다

안중근의사는 이러한 구한말 나라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고 몸으로 나서서 행동으로 막지 않으면 안될 것이란 위기의식을 갖고,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행한 독립투사가 되었다


독립이 된지 73년이나 지났는데도 우리는 안의사의 시신도 아직 찿지못해 우리나라에 모셔오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없다

또한 안의사는 나라를 되찿기 위해 목숨받쳤는데 나라를 찿고나니 이제는 좌ᆞ우의 이념 대립으로  남북이 갈라져 서로 원수가 되어 있다


참 조상들께 면목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은, 대상이 일본이 아닐뿐 주사파란 좌파들에게 점령당해 있다는 점에서 바로 구한말과 똑같다


우리 모두가 안중근의사의  구국정신과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제2의 안중근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03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