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10만여 명 중 살아돌아간 사람이 6천명에 불과했다던가? 이들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죽는 순서는 크고 건장한 사람부터였다던가?
닭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양계장 주인이 닭을 A4용지 1장 크기 공간에 집어넣고, 사료를 부실하게 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독일군이 러시아군 전쟁포로를 대할 때도 비슷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건보 정책을 들으니 독일군 포로들이 생각났다.
의료서비스는 참 요상한 게, 소비자가 어떤 상품서비스를 구매해야 하는지 모른다. 어떤 검사를 해야 할지,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통 모른다(교육도 이런 측면이 있지만, 의료와 비교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필수 의료가 아닌 미용/성형서비스와 누가 봐도 국가가 보장해줘야 할 필수의료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이거 가치, 이념, 지식, 연령, 질환, (의사)전공 등에 따라 다르다. 정말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투입(비용) 대비 산출(효과)을 의미하는 가성비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6개월을 더 살기 위해 집 한 채 값을 쓸 용의가 있는 사람도 있다. 3개월의 고통 경감을 위해서도 그런 돈을 쓸 용의가 있는 사람도 있다.
의료의 이런 특성은 세계 공통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해법은 모든 의사를 공무원으로, 거의 모든 병원을 국가기관(공공병원)으로 만들어서 해결하는 것이다. 공무원 의사가 저 애매한 것을 다 판단하는 것이다. 치료법, 약 등의 가성비는 국가 무슨 위원회가 판단하면 된다.
미국 방식도 있다. 저 수많은 애매한 것을 공급자(의사/병원) 못지않은 전문성을 가진 수많은 보험회사가 공급자와 실랑이하면서 판단하는 것이다. 개인은 보험회사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데, 보험회사와 개인의 정보와 지식 차이가 크니 바가지를 쓰기 일쑤다.
그래서 질환에 대한 표준 진단과 치료법을 만들어 포괄수가제 등을 적용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도 필요할 것이다.
한국의 보험회사는 사실상 국민건강보험 하나다. 국가독점 사업체라서 의사/병원에게는 갑 중의 갑이다. 게다가 의사나 병원이 여기를 빠져나가면 안되도록 만든 당연지정제도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많은 애매한 것을 판단한다. 급여(보험) 영역에 대해서는 어떤 검사, 어떤 치료법, 어떤 질환에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등을 판단한다. 당연히 급여 대상(질환, 검사, 서비스, 약 등)과 가격과 관련해서 어마어마한 분쟁이 있다. 실은 분쟁이 아니라 항변이다. 갑중의 갑인 국가독점 건보공단(심평원)과 을인 의사/병원은 애초에 게임이 안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던 것은 비급여 영역이라는 꽤 큰 숨구멍 내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대란이 벌써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의 의료 보상시스템이 둔탁하고, 과도하게 특수이익집단 편향이기 때문이다.
미용성형을 제외한 모든 의료에 건보를 적용하겠다는 것은 곧 모든 애매한 것을 건보가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텃밭을 없애 버리겠다는 것이다. 건보가 판단해서 배급하는 것만 먹으라는 것이다.
한국은 의료서비스에 관한 한 소비자 선택권이 세계 최고다. 먼 지방의 환자가 서울의 5대 병원에서 진료나 치료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마 세계에서 제일 쉬울 것이다. 당연히 의료 이용의 쏠림이 극심하다.
공공의료가 발달한 나라는 거의 쏠림 통제 장치가 있다. 주치의 제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의사나 병원이 생존/파산을 걱정하지 않고, 전문가적 판단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한마디로 과잉 의료를 막는 장치 내지 여건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서울/큰병원 쏠림을 제어하는 장치가 없다. 의사나 병원은 환자가 안오면 파산할 수밖에 없다. 수가가 낮아도 그렇다. 당연히 의사/병원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 만약 비급여가 급여로 되고, 의료비 경감 혜택이 주어지면, 의료 수요는 폭발한다. 이건 숱하게 경험한 일이다.
그러면 당연히 통제가 들어갈 것이다. 환자는 천차만별이고, 질환은 오만가지가 얽히고 설켜서 나타나고, 더 좋은 치료법은 계속 나오는데, 이를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건강보험이 다 알아서 판단한다? 이게 가능하다면 사회주의 국가들이 다 강성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정책 목표의 핵심이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63%를 70%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재밌다.
공적보장률은 지금이 63%인데, 2007년 당시 64.6%였다. 2004년 61.3%, 2005년 61.8%, 2006년 64.3% 였다. 2006년 들어 급상승한 이유는 입원환자의 비급여 비용 중 약 30%를 차지하던 식대가 2006년 6월에 보험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 이후 10년 동안 국민건강보험료와 의료비 지출이 얼마나 늘었던가! 2007년 25.6조원이 2014년 43.9조원으로 늘어났다. 2017년에는 50조원이 넘을 것이다.
이상이(제주대 교수)는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에 수록된 논문 ‘한국의 건강보험 문제와 복지국가 전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7년 말 현재 연간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25조원인데, 보장성 수준이 64%다. 당장 10조원을 더 투입하면 OECD 평균 수준의 보장성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재정에서 5조원을 지원하고, 보험료를 20% 정도 인상하면 사실상의 ‘완전 의료보장’에 필요한 10조원을 공적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정부가 정치적으로 결단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0년 전후해서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 돈 1000원씩 더 내면 공적보장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간다고 했고, 2017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매년 건보료를 2~3% 인상해서 이런 일을 하겠단다.
이유가 뭐겠나?
비급여 영역을 급여 영역으로 바꿔버리면, 그 동안 높은 (비급여)비용에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정치만 살아 숨쉬는 생물이 아니라 의료 수요도 생물이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의사가 공무원화되어 있고, 행위별 수가체계도 아니며, 의료기관도 명실상부한 공공의료 기관적 성격을 띠는 곳이 많다. 따라서 과잉 의료 충동을 막는 기제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유사시 정부나 보험공단이 주치의 제도 등을 통해서 말단에서 의료 수요를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적으로 2006년 새롭게 급여 항목이 된 식대, 초음파, 양전자단층촬영 등에 대한 실제 집행률은 예산보다 68% 초과하였다. 이런 일은 비급여를 급여로 바꾸는 과정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식대를 의료보험 처리했을 때는 예외적으로 공적 보장률이 계산만큼 올라갔는데 이는 식대의 의료보험화를 기회로 굶던 사람이 3끼, 4끼 먹는 짓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급여 항목과 비급여 항목이 의료 수요의 전부라면 점차적으로 재정을 늘리고 도덕적 해이를 줄여 대부분을 급여 항목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새로운 의료 장비, 약품, 서비스와 새로운 의료 수요가 끊임없이 솟아나서 비급여 영역을 끊임없이 늘려간다.
게다가 의료비의 블랙홀인 노인 인구가 급증한다. 한국 보건의료 이해관계자들의 높은 기대 수준이나 비용조장적 수가체계나 변칙.편법이 만연한 문화적 풍토로 인해 도덕적 해이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은 쉽지 않다. 공적 보장률의 상향은 다가가면 또 멀어지는 무지개와 비슷하다. 그래서 아예 비급여 영역을 획기적으로 줄여버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과잉의료 충동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국가 통제=책임 영역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 재정이 파탄나든지, 의료시스템이 파탄나든지 할 수밖에 없다. 의료시스템의 파탄이란, 필수의료라서 통제를 많이 받는 과들이 완전히 망하는 것이다. 기술 발전도 없고, 전공하려는 사람도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미 상당 정도 그렇게 되어 있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에서 의사를 수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의사와 병원은 소련군 수용소에 갇힌 독일군 포로와 비슷하다. 먹을 것을 던져주는 존재는 환자다. 환자의 돈은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지급된다. 환자들이 많이 몰리는 의사/병원은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파리를 날리면? 그냥 파산이다.
그 동안 비급여 영역이 꽤 있어서 이러저러한 창의성과 변칙을 부릴 여지가 있었다. 비급여 영역은 사회주의 국가 농촌의 텃밭과 비슷한 존재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의료에 건보를 적용한다는 것은 이런 텃밭을 없앤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난 1월 16일 문재인케오를 논의한 건강보험 보장성강화 실행방안 모색 정책토론회
내가 문재인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을 잘 몰랐다면, 비정규직이든 공공부문 81만개든 최저임금이든, 엄청나게 많은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자문을 받으면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이 사람들을 꽤 잘 안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몇 년 전 2시간 반 동안 독대를 하면서 고용노동 문제를 강론하고 토론한 적이 있다(기록자 1명이 배석했고, 내가 쓴 책 몇 권도 드렸다. 그 책의 워딩을 종종 쓰는 것도 확인했다). 이후 수많은 발언들을 애정과 기대로 거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추적했다. 그러다가 실망을 넘어 경악했다. 티비에 얼굴 비치는 문재인 주변 선수들과 온오프에서 인연이 많은데 문재인과 코드가 잘 맞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은 암만 봐도 한국 사회의 독특한 특성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장하성의 책, 비정규직,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최저임금제 등에 대해 긴 글을 쓴 것은 그 때문이다(원전과 부동산은 내 지식이 딸려서 거의 쓰지 않았다).
최근 발표한 보건의료 정책도, 참여정부 관계자와 민주진보 동네서 가장 성찰이 얕고 지성이 빈약한 사람들의 과감한 결단처럼 보인다. 당연히 이는 국가적 재앙으로 간다.
하지만 나 외에도 문정부의 의료 정책에 대해서는 얘기할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길게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리 의사들이 보통 똑똑해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