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차남 앤드루 마운트배튼 윈저 [EPA=연합뉴스]
미국의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틴이 저지른 범죄에 깊숙이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는 앤드루는 현재 형인 찰스 3세 국왕에 의해 왕자 직함과 요크 공작 작위 등 모든 왕실 훈작을 빼앗긴 상태다. 과거 그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영국의 국제 무역 및 투자를 담당하는 특별 대표직을 역임한 바 있다.
영국 정부가 이 날 전격 공개한 앤드루의 특사 발탁 관련 공식 행정 문서에는 데이비드 라이트 당시 영국국제무역청 대표가 여왕을 보좌하는 관리와 긴밀한 논의를 나눈 뒤 2000년 2월에 직접 기록한 비망록이 수록되었다고 영국 방송 BBC를 비롯한 현지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작성된 문서에서 라이트 대표는 "여왕의 소망은 이 역할이 켄트 공작(여왕의 사촌인 에드워드 왕자)에서 요크 공작으로 계승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는 여왕이 직접 차남의 대외 직함 승계를 원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풀이된다.
아울러 라이트 대표는 문서에 "(앤드루는) 매년 해외 시장에서 특정한 무역 촉진 방문에 2∼3차례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뒤이어 국익을 위해 "우리는 요크 공작이 런던에서 저명한 해외 인사들을 만나고 필요시 식사나 리셉션을 주최하기를 바란다"라는 실무적인 기대감도 함께 덧붙였다.
앤드루는 엡스틴 스캔들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2019년 모든 왕실 공식 임무에서 전격 은퇴했다. 그러나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식의 과오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감싸기에 급급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비난 여론 속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형 찰스 3세 국왕은 결국 지난해 동생의 모든 군 공식 직함과 훈작을 강제로 회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올해 초 미국 법무부가 보관하던 이른바 '엡스틴 파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파문은 더욱 확산했다. 앤드루가 10년간 무역 특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취득한 국가 무역 및 투자 관련 대외비 정보를 엡스틴에게 몰래 넘겼다는 치명적인 첩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앤드루는 지난 2월 공직자로서 직권을 남용한 부정행위 혐의가 적용되어 수사 당국에 피의자 신분으로 붙잡혔다가 조사를 받고 가석방 형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처럼 왕실을 둘러싼 도덕성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영국 정치권의 야당 세력들은 앤드루가 과거 특사로 임명될 당시의 정부 기록물을 투명하게 세상에 밝히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따라 영국 행정부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관련 서류들을 전면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앤드루 측은 현재까지도 자신은 엡스틴과 연관된 일련의 범죄 행위와 무관하며 어떠한 위법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완강히 항변하고 있지만, 그를 향한 사법 리스크와 각종 의혹은 찰스 3세 체제의 영국 왕실 전체에 심각한 정치적·도덕적 타격을 입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