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에 멋진 배가 있었다. 이 배를 계속해서 쓰다 보니 부품을 하나 둘씩 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 년쯤 지나 오늘날에 이르니 이 배의 모든 부품이 완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천 년 전의 그 배일까, 혹은 다른 배일까.
▲ 천 년 전 배의 부품을 모두 갈았다면 그 배는 같은 배일까. 사진은 노아의 방주 모형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집합론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집합은 원소를 필요로 한다. 원소가 없는 집합은 집합이 아니다. 만약 A라는 배가 1,2,3 이라는 부품을 가진 것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A = [1,2,3]. 1000년이 지나 A’ = [1′,2′,3′]이 되었다. 그렇다면 A는 이전의 A와 이후의 A’가 다른 A일까?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A에 속한 모든 원소들을 더하거나 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원소가 있다. A라는 배의 모든 부품을 버리고 없애도 A는 ∅(공집합)을 원소로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나’라는 물음에 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수학에서 미스테리한 숫자인 0과 공집합은 통하는 부분이 많다. 공집합은 정의내릴 수 없는 집합이다. 오죽하면 공집합의 정의를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라고 했겠나.
전체 집합 U의 여집합은 ∅ 이다. 그러면 U에는 ∅ 이 없어야 하는데, U에는 또 ∅ 이 존재한다. 반대로 ∅ 에는 아무런 원소가 없어야 하는데, ∅ 자체로 또한 U이다. 이를 불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 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이 설명과 통한다.
나는 죽음 이후에도 내 모든 것이 소멸한 뒤에도 여전히 나다. 내 의지가 이 세상에 남아 계속해서 세상을 움직이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혹은 누군가의 메모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
배의 모든 부품이 사라져도 그 배는 여전히 그 배다. 그 배의 원형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머리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배의 실재는 머리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믿음이라는 ∅ 속에서만 모든 것이 어우러지고 하나 될 수 있다. ∅ 바깥의 그 어떤 원소로 해도 인간은 같아질 수 없다. 하나될 수 없다. 전체는 아무리 팽창해도 공집합 하나보다 작은 까닭이다. ∅은 U의 바깥에 또 U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전체주의는 자유로운 사회에 무릎 꿇는다. 손오공이 제아무리 까불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듯.. 이 문제는 뇌의 문제와도 관계가 되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왜 영혼이 먼저이고 육신이 나중인가. 영혼없이 육신만 살아나면 좀비가 되지만, 육신이 없이 영혼만 있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이런 전체주의적인 아이디어로 인간을 설계하는 이야기다. 인간은 ∅을 알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을 설계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모든 부분 바깥에 있는 생기(生氣)를 부여할 수 없다.
경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큰 까닭에 제조업의 효율성이 가능하다. 자본이란 시간이다. 완성된 제품에는 절약된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부품들이 모여 다시금 전체를 만들때 전체에서 부분의 합을 뺀 만큼 자본을 만든다. 그것은 누군가 독점할 수 없다. 고스란히 사회에 녹아들어 만인에게 재분배된다. 왜 그런가? 전체에서 부분의 합을 뺀 나머지 값을 인간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른 나라 사회를 보며 우리사회에는 ‘A라는 원소가 없어, B라는 원소가 없어’라며 온갖 원소들을 타령하며 이것들을 갖고와서 전체 집합을 키워야 된다는 헛소리를 한다. 우리 사회의 원인은 ∅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인간 내면에도 있고 인간 외부에도 있다. 모든 것이 자유 속에서 어우러지고 동시에 함께 할 수 있다.
어떤 집합 안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그 집합의 부분집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답은 집합 바깥에 있다. 절벽에 다다라 한발짝 더 내딛어라. 혹 그럴 수 없다면 주저 앉아 보리수나무 아래로 기어가라. 절벽 아래에도 보리수 나무 아래에도 똑같은 ∅이 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더큰 집합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잊혀졌을 때 죽는다. 관짝에 누웠을 때가 아니라.
자유도 그렇다. 노병이 죽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수록 공동체는 쪼그라들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수록 공동체는 커지게 된다. 왜 그런지는 말로써는 설명하기 어렵다. 전체 U의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