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나무를 보았다. 아니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냥 지나치는 거냐며 자기를 모르겠느냐고 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내가 너를 어떻게 알겠느냐며 바라보았다. 그는 몹시 서운하다는 듯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난 여기 처음이야. 그리고 너도 처음 보는 거야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내 마음속엔 늘 자기가 있었단다. 그걸 자기는 금방 알아보았다고 했다.
순간 육십년도 더 된 기억의 실오라기 하나가 사르르 피어올랐다. 석류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와 섰다. 처음 보는 이 나무와 키도 비슷한 거 같다. 역시 잘 자란 것 같지는 않다. 보이는 나뭇가지도 별로 튼실해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각골 우리 집 마당가에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한 해에 서너 개 겨우 열매가 열리는 나무였다. 내 키보다도 많이 크지 않아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는 나무였다.
작은이모가 석류를 좋아했다. 이모는 황금빛 이를 드러내고 함박 웃고 있는 석류의 반을 쪼개 내게 주며 먹어보라 했다. 한 알을 손가락으로 떼 내어 입에 넣자 눈이 순식간에 찡그려지며 소름이 돋도록 신 맛이 나를 놀라게 했다.
“네 엄마가 엄청 석류를 좋아 했느니라” 이모가 갑자기 엄마라 했다. 엄마가? 순간 나는 석류 알을 다시 입에 넣어봤다. 신맛이 아까보다는 좀 덜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왜 이리도 신 것을 좋아했을까. 맛보다도 석류 알의 황금빛 때문이었을까.
이모는 그 나무를 엄마가 심었다고 했다. 3년 만에 석류가 딱 한 개 열렸는데 그걸 엄마가 혼자 다 먹었다고 했다. 석류 맛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이모는 입맛만 다셨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고 했다. 다음 해엔 두 개가 열렸는데 하나를 먹으라고 주더란다.
이모는 아기 이빨 같은 황금빛 석류 알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하며 입에 넣었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신기할 만큼 좋았다고 했다. 그걸 아껴 먹느라 며칠을 한 알씩 두 알씩 떼어 먹었는데 오늘 것이 어제 것보다 더 맛이 있었고 그걸 다 먹는 동안 참으로 행복했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해 석류가 여러 개 열렸을 때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었다고 했다. 다음 해부터 이모도 석류를 보면 언니가 더 생각날 것 같아 아예 그걸 따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이모가 내게 석류를 따서 먹어보라 준 것이었다.
나처럼 그 나무도 늘 혼자였다. 큰 오동나무가 서있는 마당 귀퉁이에서 관심도 받지 못하는 나무였다. 석류는 해마다 세 개나 네 개씩만 열렸다. 그러다가 이모가 시집을 갔고 그 다음 다음 해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하면서 이별을 했다. 나는 그걸 파다 심자고 했지만 할머니가 반대를 하셨다. 늙기도 했고 나무가 이쁘지도 않다는 거였지만 할머니도 어쩜 큰 딸이 떠나버린 안타까운 기억을 그곳까지 갖고 가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난 사실 참 아쉬웠다.
엄마가 심었다는 그 나무, 두 번 겨우 따먹고 가버린 그 석류나무, 엄마는 왜 그 나무를 심었을까. 석류를 좋아했다는 엄마와 덩달아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모를 생각나게 하는 나무, 그 석류나무를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그랬구나. 내 기억 속 깊이 잠재해 있던 그 나무가 먼저 나를 알아봤고 그래 나를 부른 것이었다. 미안하다. 너 아니었음 자칫 지나칠 뻔했구나. 사람의 기억은 늘 그렇게 흐려지고 잊혀 진단다. 그래도 널 보니 오래전의 기억인데도 이렇게 생생하게 떠올라 참 신기하다. 고맙다. 석류나무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무가 바르르 떠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열매 두 개가 젖꼭지처럼 수줍게 톡 맺혀있다. 저게 자라고 나중엔 벙긋 벌어져 황금빛 이를 드러내겠지. 그러고 보니 그 나무에 달린 활짝 벌어진 석류를 여러 번 본 것 같다.
이모는 그런 꼭 벌어진 석류만 땄는데 그런 게 더 맛이 있다 했다. 나는 부시도록 빛나는 석류 알을 보면서 침이 입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먹고 싶기보다는 그 신맛이 먼저 느껴져서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석류나무를 만난 것이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었다. 이모도 가신지 삼년이나 되었다. 석류나무는 그런 내게 어머니는 잘 계신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모와도 만났을 것이다. 두 분이서 어쩌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직 형체조차 다 갖추지 못한 석류열매를 살짝 건드려 본다. 그래 잘 커서 열매가득 피어나거라. 고맙다. 엄마의 기억을 살려내 주어서. 이 또한 내겐 귀한 추억이 되겠다. 이파리 하나를 따서 수첩 속에 끼워 넣는 내 손등으로 바람 한 자락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