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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관찰] 주룽지의 죽음이 소환한 ‘장주시대’…시진핑 향한 중국인들의 불만 터지나? - 한 원로의 죽음이 불러낸 두 시대의 극명한 대비 - “그때는 미래를 믿었다”…다시 소환된 장주시대 - 시장을 키운 주룽지, 시장을 통제한 시진핑
  • 기사등록 2026-08-14 05: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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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로의 죽음이 불러낸 두 시대의 극명한 대비]


중국 개혁·개방의 ‘경제 총설계사’로 불렸던 주룽지 전 국무원 총리가 12일 베이징에서 97세로 별세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단순히 중국 원로 정치인 한 명의 퇴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키고 시장경제의 문을 활짝 열었던 장쩌민·주룽지 시대, 이른바 ‘장주시대(江朱時代)’와 국가가 시장을 다시 장악한 시진핑 시대를 비교하는 목소리가 중국 안팎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개혁 시대를 직접 경험한 중국인들에게 주룽지는 중국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었던 시기를 상징한다. 반대로 시진핑 시대는 민영경제 위축과 청년실업, 부동산 붕괴, 지방정부 부채, 외국 자본 이탈이 한꺼번에 겹친 시대다. 따라서 주룽지를 향한 추모가 커질수록 그것은 역설적으로 “중국은 왜 개혁의 길에서 후퇴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진핑 체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로이터통신은 12일 늦게 중국 관영 신화통신을 인용해 “주룽지는 12일 오전 11시께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면서 “1928년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 상하이 시장에 오른 뒤 상하이 당서기와 국무원 부총리를 거쳐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무원 총리를 지냈다”고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은 공식 부고에서 그를 “오랫동안 검증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자 “뛰어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기억하는 주룽지는 공산당 원로라기보다 중국 경제의 체질을 바꾼 강력한 기술관료에 가깝다. 


워싱턴포스트(WP)는 “주룽지는 중국의 계획경제를 시장 친화적인 경제로 전환하는 데 앞장선 ‘경제 차르’”라고 규정하면서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유기업과 금융기관을 구조조정했으며 중국의 WTO 가입 협상을 진두지휘했다”고 밝혔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생전 주룽지를 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개혁 프로그램과 씨름한 예리한 지성으로 평가했다. 주룽지의 별세가 한 인물의 죽음을 넘어 중국의 개혁적 경제 낙관주의가 완전히 저물었음을 상징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때는 미래를 믿었다”…다시 소환된 장주시대]


주룽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장쩌민과 주룽지가 중국을 이끌었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당시에도 천안문(톈안먼) 사태 이후의 정치적 억압과 언론 통제, 심각한 부정부패가 존재했다. 장주시대를 자유와 민주주의의 시대로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많은 중국인에게 이 시기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세계와의 문이 넓어졌으며, 개인의 노력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가 살아 있던 시대로 기억된다.


이러한 향수는 2012년 시진핑 집권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장쩌민은 중국 인터넷에서 ‘어른’ 또는 친근한 별명으로 재평가됐고, 주룽지는 권력자와 기득권 앞에서도 사실을 말했던 지도자로 회고돼 왔다. 이는 두 지도자가 민주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보다 집단지도체제가 작동했고 전문성을 갖춘 기술관료들이 정책을 주도했으며 경제적 실용주의와 대외 개방이 존중됐다는 인식 때문이다.


더욱이 장주시대에는 공산당 내부에서도 정책을 둘러싼 토론과 이견이 일정 부분 허용됐다. 총리는 경제정책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목소리를 냈고 정부 부처와 경제 관료들에게도 정책 공간이 있었다. 반면 시진핑 시대에는 당 중앙의 각종 영도소조가 위원회로 격상되면서 경제와 금융, 기술, 안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의사결정이 시진핑에게 집중됐다. 주룽지의 죽음이 전문 관료가 경제를 이끌던 시대와 최고지도자 한 사람의 정치적 판단이 경제를 지배하는 시대를 대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주룽지는 1998년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앞에 지뢰밭이나 깊은 낭떠러지가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전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부패 척결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돌아올 것까지 포함해 “100개의 관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일화도 그의 강직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성과만 최고지도자에게 돌리는 현재 중국의 정치문화와 비교하면 이러한 모습은 더욱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수천만 명의 해고를 감수한 ‘고통스러운 개혁’]


물론 주룽지의 개혁이 모두 성공적이거나 따뜻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 공영방송 NPR은 “주룽지는 ‘큰 것은 장악하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는 원칙 아래 대형 국유기업은 국가가 유지하되 경쟁력이 없는 중소 국유기업은 매각하거나 폐쇄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적게는 3000만 명, 추산 방식에 따라 최대 6000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고 짚었다.


NPR은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 국유기업 노동자에게 직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며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주택과 의료, 연금과 자녀 교육 혜택까지 한꺼번에 잃는다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NPR은 “대규모 하강(下崗·해고) 사태로 중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항의가 벌어졌고, 주룽지는 개혁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밀어붙였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주룽지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비효율적인 국유기업과 은행을 수술했다. AP통신은 “1998년에는 국유기업 소유 주택을 주민들에게 매각해 도시 주택의 사유화를 촉진했고, 2001년에는 보수파와 국유기업의 반발을 뚫고 중국의 WTO 가입을 성사시켰다”면서 “중국이 값싼 노동력과 해외 자본·기술을 결합해 ‘세계의 공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반이 이 시기에 마련됐다”고 짚었다. 


[시장을 키운 주룽지, 시장을 통제한 시진핑]


주룽지 시대와 시진핑 시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다. 주룽지의 노선은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되 시장의 역할을 확대하고, 정부와 국유기업의 비효율을 줄여 민간기업과 외국 자본이 성장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반면 시진핑은 2012년 집권 이후 당의 통제를 경제 전반으로 확대하고 국유기업의 주도적 지위를 강화했다.


알리바바와 디디추싱 등 거대 민영기업에 대한 전방위 단속, 사교육 산업 해체, 기업 내부 공산당 조직 확대, 부동산업계에 대한 급격한 규제는 ‘국진민퇴(國進民退·국유부문은 전진하고 민간부문은 후퇴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민간기업의 창의성과 시장의 자율성보다 국가안보와 당의 통제가 앞서면서 중국 기업가들은 투자를 주저하게 됐고, 외국 자본도 중국의 정책적 불확실성을 피해 생산기지를 분산하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공산당 내부 기득권의 저항과 싸웠다면, 시진핑은 공산당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을 통제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과거에는 경제성장이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면, 시진핑 시대에는 정치적 충성과 국가안보가 경제성장보다 우선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주룽지에 대한 추모는 자연스럽게 현재 중국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 세계로 진출하던 중국이 다시 폐쇄와 자립을 강조하게 됐는가, 왜 민영기업가들은 투자 의욕을 잃고 외국 기업은 중국을 떠나는가, 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지방정부는 부채에 짓눌렸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끝에는 시진핑의 경제노선과 권력 집중에 대한 책임론이 자리한다.


[주룽지가 남긴 개혁의 그늘도 직시해야]


오늘날 중국이 겪는 모든 문제를 시진핑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주룽지가 1994년 추진한 분세제 개혁은 중앙정부의 세입을 크게 늘렸지만 지방정부에는 과도한 지출 책임을 남겼다. 부족한 세수를 토지 매각과 부동산 개발로 충당하는 ‘토지재정’ 구조가 이때 굳어졌고, 이는 지방정부 부채와 부동산 거품의 토대가 됐다.


이와 관련해 로이터통신도 “WTO 가입으로 중국은 폭발적인 수출 성장을 이뤘지만 해외 수요와 제조업 투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불균형도 커졌다”면서 “주룽지의 개혁이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동시에 지방재정과 수출 의존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남겼다”고 분석했다. 주룽지가 오늘날 중국 경제 위기의 씨앗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주룽지 시대와 시진핑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제가 없었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 어디를 향했느냐에 있다. 주룽지는 시장을 확대하고 세계와 연결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반면 시진핑은 당의 통제와 국유부문을 강화하고 경제 문제까지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주룽지가 남긴 불완전한 개혁을 완성하기보다 오히려 개혁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Why Times Insight]


주룽지의 죽음이 중국 정치에 던지는 진짜 충격은 과거의 지도자를 추모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중국인들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장주시대와 시진핑 시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이었는가”를 묻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장주시대 역시 억압과 대량 해고, 부패와 불평등의 시대였지만 적어도 중국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경제 개혁을 지속하던 시기였다.


반면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권력 집중과 국가자본주의 강화, 민간경제 위축과 대외 갈등 속에서 성장 동력까지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장주시대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과거 미화가 아니다. 현재를 직접 비판하기 어려운 중국인들이 과거의 지도자를 칭송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우회적인 정치 행위다.


시진핑 체제에는 바로 이 지점이 부담이다. 주룽지 추모 여론을 강하게 통제하면 개혁 시대의 유산을 부정한다는 반발을 부를 수 있고, 그대로 허용하면 장주시대와 시진핑 시대를 비교하는 여론이 확산될 수 있다. 주룽지의 장례가 단순한 국가 원로 추도 행사가 아니라 중국의 잃어버린 개혁 시대를 소환하는 정치적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 당국이 주룽지를 아무리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로 추켜세워도 그가 상징했던 시장화·개방·기술관료주의와 시진핑이 밀어붙인 국가통제·자립·일인 권력체제의 차이까지 지울 수는 없다. 주룽지의 죽음으로 중국인들이 애도하는 것은 한 명의 전직 총리만이 아니다. 개혁하면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 세계와 가까워질수록 중국도 강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의 종말이다.


그리고 그 집단적 애도가 깊어질수록 질문은 결국 한곳으로 향하게 된다. 중국의 개혁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성장과 희망의 시대를 멈춰 세운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주룽지의 죽음은 시진핑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질문을 중국 사회에 다시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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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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