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보라인서 터져 나온 “온 나라가 전쟁해야 한다”]
러시아가 4년 넘게 유지해온 ‘전쟁과 국민 일상의 분리’가 한계에 부딪혔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후방 깊숙이 파고들고, 병력 충원과 국가재정마저 동시에 흔들리자 크렘린 안보라인에서 9월 국가두마 선거 이후 계엄령 또는 그 일부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거 연기론과 추가 동원설까지 별개의 소식통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푸틴 정권이 더 이상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만으로 전쟁의 충격을 가릴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아직 계엄령 선포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크렘린 내부에서 이 카드가 실제 선택지로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다급해졌는지를 보여준다.

러시아 독립매체 베르스트카는 최근 연방·지방정부 관계자와 두마 계파 지도부 인사, 크렘린과 협업하는 정치 컨설턴트 등을 인용해 “9월 국가두마 선거 이후 러시아 전역에 계엄령 또는 그 일부 요소를 도입하는 방안이 정부 내부에서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르스트카는 이어 “특히 일부 실로비키, 곧 군·정보기관·치안기관 출신의 강경파들은 이제 국민을 전쟁에서 분리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온 나라가 함께 싸우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면서 “크렘린과 협업하는 한 관계자는 전선에서 심각한 실패가 발생하거나 병력 충원이 무너질 경우, 그것이 계엄령 도입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두마의 한 소식통도 “나라의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며 “극단적 조치 없이는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말 그대로 크렘린 안보라인에서 “기존 방식으로는 더 버티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계엄령은 단순한 통행금지 조치가 아니다. 푸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평의회의 승인을 받으면 이동 제한과 집회 금지, 언론·인터넷 검열, 정당과 사회단체 활동 정지, 민간시설 징발, 국방 관련 강제노동까지 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 선거 일정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현재 러시아의 권력구조를 고려하면 연방평의회가 푸틴의 결정을 거부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결국 계엄령은 병력·노동력·민간자산·정보를 국가가 하나의 명령체계 아래 묶는 ‘총동원 체제’의 법적 우산이 될 수 있다.
[선거를 치를 것인가, 아예 미룰 것인가]
계엄령 가능성이 갑자기 등장한 것도 아니다. 러시아 독립매체인 메두자는 지난 6월 “러시아의 드론 방어 문제가 심각해진 이후 연방보안국(FSB) 지도부와 푸틴의 옛 경호원 출신인 빅토르 졸로토프 국가근위대장이 두마 선거 연기를 설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메두자는 이어 “배경에는 집권 통합러시아당의 지지율 하락이 있었다”며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기관 조사에서도 통합러시아 지지율은 30%대 중반까지 떨어졌고, FSB 내부 조사에서는 이보다 더 낮은 결과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까지 크렘린의 기본 시나리오는 예정대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거 이후’가 위험한 것일까. 푸틴 정권은 국민의 반발이 예상되는 결정을 선거 직후 발표해온 전례가 있다. 2022년 9월의 부분동원령도 지방선거가 끝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표됐다. 이번에도 통합러시아의 승리를 먼저 만들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뒤 계엄령이나 추가 동원 같은 비인기 조치를 꺼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지금 크렘린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저울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정대로 선거를 치른 뒤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안보 상황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연기하는 방안, 그리고 공식 계엄령 대신 검열·이동 제한·추가 동원 등 일부 요소만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이다.
[휴양지 참사가 무너뜨린 ‘안전한 러시아’ 신화]
이런 논의가 민감해진 결정적 배경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국민의 일상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메두자는 “지난 3일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흑해 휴양지 아르히포-오시포프카 해변에 드론이 추락해 어린이 3명을 포함한 7명이 숨지고 약 40명이 다쳤다”면서 “러시아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공격이라고 주장했지만, 드론이 러시아 방공망의 사격이나 전파방해로 통제력을 잃었을 가능성도 제기돼 정확한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러시아 사회에 남긴 충격이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푸틴 정권은 그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을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제한된 군사작전으로 포장해왔다”며 “국민은 군을 지지하되 자신의 일상까지 전쟁에 내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크렘린과 러시아 중산층 사이의 암묵적 계약이었다”고 짚었다.
더타임스는 “그러나 모스크바의 공항과 정유시설이 반복적으로 멈추고, 흑해 휴양지에서 어린이까지 숨지면서 ‘러시아 본토는 안전하다’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전쟁을 국민에게서 떼어놓으려던 푸틴의 통치 공식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라 설명했다.
[돈을 더 줘도 병력이 모이지 않는다]
전선의 병력 사정도 계엄 시나리오를 부추기고 있다. 독일 국제안보문제연구소의 야니스 클루게는 러시아 연방·지방정부의 예산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올해 1분기 러시아군 신규 계약병은 하루 평균 약 80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감소했다”면서 “러시아 지방정부들은 계약금과 각종 수당을 계속 올리고 있지만, 과거처럼 돈만으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짚었다. 야니스 클루게는 또한 “지역정부의 재정 부담도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면서 “추가 동원 가능성이 가을 정국의 핵심 변수로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는 “계엄령이 도입되면 크렘린은 추가 동원과 이동 제한을 보다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는 2022년 부분동원령 당시 발생했던 대규모 국외 탈출과 사회적 동요를 다시 촉발할 위험도 크다. 푸틴이 지금까지 전국적 계엄령을 피한 것도 이 때문”이라 짚었다.
[전쟁비용에 짓눌린 러시아의 곳간]
재정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러시아의 2026년 군사비를 약 14조9000억 루블, 국내총생산의 6.3% 수준”으로 추산했다. 전쟁이 러시아 정부의 예산과 산업·노동력을 빨아들이는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로이터통신도 “올해 상반기 러시아 연방재정 적자는 5조7300억 루블로, 당초 편성된 연간 적자 목표 3조7900억 루블을 이미 크게 넘어섰다”면서 “러시아 정부는 연간 적자 전망을 4조8300억 루블로 확대했지만, 추가 지출이 발생하면 실제 적자는 이보다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이어 “전쟁을 계속하려면 병사에게 지급할 계약금과 보상금, 무기 생산비, 후방 방공망 구축비를 모두 늘려야 한다”면서 “반면 석유·가스 수입과 민간경제가 이를 충분히 떠받치지 못한다면 결국 증세와 국채 발행, 복지 축소, 민간자금 동원으로 부담이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계엄령이 거론되는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렘린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거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과 돈, 산업시설을 국가가 강제로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체제다.
[Why Times Insight]
계엄령은 자신감에 찬 정권이 꺼내는 카드가 아니다. 전선과 병력, 재정과 여론을 기존 방식으로 더 이상 관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권이 마지막 단계에서 검토하는 통제수단이다.
물론 푸틴이 실제로 전국적 계엄령을 선포할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공식 계엄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전쟁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이자, 푸틴이 약속해온 ‘평온한 일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계엄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채 추가 동원과 검열, 이동 제한, 민간경제 통제를 하나씩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관건은 9월 두마 선거와 그 직후 몇 주다. 푸틴이 선거를 예정대로 치른 뒤 계엄령의 일부 요소를 꺼낼 것인지, 아니면 본토 공격을 명분으로 선거 연기와 전면적 전시체제 전환을 선택할 것인지가 러시아의 다음 국면을 결정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크렘린에서 계엄령이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강해졌다는 신호가 아니다. 푸틴의 ‘특별군사작전’ 방식으로는 이제 더 버티기 어렵다는 경고음이다.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