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길 whytimespen1@gmail.com

['파트너'에서 '시스템적 라이벌'로 — 뒤집힌 유럽의 대중 시각]
유럽연합(EU)이 수십 년간 유지해 온 대중(對中) 경제 전략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하기 시작했다. EU 외교수장 카야 칼라스는 중국 의존 문제를 '암 치료'에 비유하며 고통스러운 구조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태양광과 배터리, 산업용 로봇까지 중국이 유럽 핵심 산업을 잠식하는 가운데, 브뤼셀 내부에서는 "공황 상태"라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제 유럽은 값싼 중국산 제품의 혜택과 산업 생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면에 들어섰다.

유럽연합(EU)의 정치·정책·문화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뉴스 및 분석 플랫폼 브뤼셀스 시그널(Brussels Signal)은 최근 “EU의 최고위 외교 책임자가 사상 유례없이 강도 높은 언어로 중국을 겨냥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브뤼셀스 시그널은 이어 “칼라스 고위대표는 지난 5월 17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린 연례 렌나르트 메리 콘퍼런스(Lennart Meri Conference)에서 ‘중국의 강압적 경제 관행, 불공정 경쟁, 배터리·화학·조선·원자재 등 핵심 분야에서의 지배력에 대한 진단은 유럽이 이미 명확히 내려놓고 있다’고 밝혔다”면서 “그는 곧이어 ‘만약 매우 심각한 병, 즉 암에 걸렸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모르핀 투여량을 늘리거나, 항암치료를 시작하거나’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칼라스는 “모르핀을 늘리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지만, 항암치료는 고통스럽다”고 덧붙이며, “중국산 수입품과의 경쟁을 돕기 위해 유럽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직격했다.
칼라스의 발언은 삽시간에 확산됐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즉각 논쟁이 불거졌다. ‘브뤼셀 시그널’을 비롯한 일부 언론은 “칼라스가 중국을 '암'이라고 불렀다”고 보도했고, 소셜미디어에서는 해당 발언을 캡처한 게시물이 수백만 뷰를 기록했다. 그러나 유로뉴스(Euro News)는 “칼라스의 발언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문자 그대로 중국 자체를 '암'이라고 지칭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무역 압력과 경제 경쟁에 유럽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르핀'은 중국산 수입품에 맞서 유럽 기업을 돕는 보조금 정책을, '항암치료'는 베이징의 보복을 유발할 수 있는 강경한 EU 무역 대응 수단을 의미했다.
눈여겨볼 것은 칼라스의 비유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수사 때문이 아니다. 유럽의 핵심 산업이 중국 공급망에 깊숙이 종속되면서 스스로 대체 능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뉴스는 “2024년 기준 중국은 유럽에 수입되는 태양광 패널의 98%를 공급했는데, 이는 10년 전 68%에서 수직 상승한 수치”라면서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수입에서도 중국 비중은 2019년 75%에서 88%로 뛰었으며, 인버터 수입의 중국 의존도도 2018년 45%에서 61%로 높아졌다”고 짚었다. 유럽의 그린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중국 의존도가 심화되는 역설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로뉴스는 이어 “산업용 로봇 분야의 수치는 더욱 충격적인데, 2025년 초부터 2026년 초 사이 EU의 중국산 산업용 로봇 수입은 315% 급증한 반면 평균 가격은 29% 하락했다”며 “중국의 '중국제조 2025' 전략이 국가 보조금·저금리 대출·세제 혜택을 총동원해 첨단 로봇 분야 기업을 2020년 대비 세 배 이상 육성한 결과”라고 밝혔다. 유럽이 제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 자동화를 확대할수록, 정작 자동화 장비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유로뉴스는 “유럽 태양광 제조 기반의 붕괴는 이미 벌어진 일로, 전기차 분야는 그 다음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2024~2025년 두 해 동안 유럽 전기차 산업은 10만 4000개의 일자리를 잃었으며, 풍력 산업도 중국 경쟁자들에게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내주고 있는데, 베이징이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왜 '모르핀'은 답이 아닌가 — 보조금의 구조적 한계]
브뤼셀스 시그널은 “칼라스가 보조금을 '모르핀'으로 규정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보조금이 지속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도 입증된다”고 꼬집었다.
유명한 경제학자인 알리샤 가르시아 에레로 연구원은 “중국 전기차의 경쟁력이 단순히 우월한 산업 모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국 내 국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왜곡을 보상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 있는 분야에 보조금을 집중한 결과”라면서 “유럽이 동일한 방식으로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면 문제의 증상만 완화할 뿐 근원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짚었다.
브뤼셀스 시그널은 “유럽의회 연구 결과도 같은 결론을 지지한다”며 “보조금으로만 투자를 유치하려 할 경우, 프로젝트가 유럽 전체의 산업 역량을 높이는 대신 EU 내에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즉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내부 자원을 재배치할 뿐이다. 칼라스가 경고한 것처럼, “결국 부유한 나라들도 보조금 재원이 바닥날 것이고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브뤼셀스 시그널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의 전략이 단기 보조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중국의 15차 5개년 계획(2026~2030년) 청사진은 신에너지·신소재·수소·핵융합을 핵심 성장 동력으로 명시하며 전략 제조 분야 지배력 강화를 한층 심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유럽이 보조금으로 현재의 격차를 메우는 동안 중국은 다음 세대 산업으로 이미 달려가고 있다.
[칼라스의 처방이 옳은 이유 — '항암치료' 수단들의 실효성]
칼라스가 제시한 '항암치료' 수단들—외국인 투자 심사, 공공조달 규정, 수출 통제, 공급망 다변화—은 이미 부분적으로 실효를 내기 시작했다. EU의 외국보조금규정(FSR)은 중국의 보조금이 EU 내부 시장을 왜곡하는 방식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도구로, 베이징이 이 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수단이 실제 효과를 내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EU퍼스펙티브(EU Perspective)는 “태양광 인버터 분야에서는 이미 처방이 집행됐다”며 “EU의 태양광 인버터 가운데 약 70%가 중국 제조사 제품이고, 화웨이 단독으로 2024년 기준 전 세계 태양광 인버터 용량의 29%를 차지하는데, EU는 2025년 12월 태양광 인버터를 고위험 의존품으로 공식 지정한 후, 고위험 공급자 제품을 사용하는 사업에 대한 EU 자금 지원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보조금이 중국산 제품을 구매하는 데 쓰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첫 단추를 낀 것이다.
유로뉴스도 지난 29일, “징동닷컴(JD.com)의 독일 체코노미(Ceconomy) 인수에 대한 EU의 심층 조사도 칼라스가 말한 처방의 구체적 실행”이라면서 “유럽 산업계는 이미 무역 방어 수단을 ‘더 유연하고, 더 빠르고, 선제적으로’ 써달라고 집행위에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밝혔다. 칼라스의 발언은 그 요구에 대한 정치적 동력을 제공한다.
["공황 발작" 인정한 EU 내부 — 늦었지만 필요한 각성]
유로뉴스는 “칼라스의 발언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그 내용을 반박하지는 못한다”며 “익명을 요구한 EU 고위 당국자는 ‘최근 몇 주 사이 중국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공황 발작을 경험하고 있다’며 ‘중국 이슈가 너무 오랫동안 묵인돼 왔다’고 직접 인정했다”면서 “브뤼겔의 체틀마이어 소장도 ‘지금 브뤼셀 어조는 공황이다. 산업 붕괴가 임박했다는, 위험이 눈앞에 닥쳤다는 공포감이 팽배하다’고 진단했다”고 밝혔다. 유로뉴스는 “내부에서도 위기를 인정하면서, 그 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말한 사람에게 '외교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눈총을 보내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중국 관영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는 “EU가 무역 장벽이라는 '잘못된 처방'을 쓰고 있다”고 반박하면서도, 정작 “핀란드 보안정보국장이 유럽이 미국 소프트웨어와 중국 하드웨어에 동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을 ‘두 가지 암에 침투당한 신체’에 비유했다”고 소개했다. 적국의 관영매체조차 암 비유가 얼마나 정확한 현실 묘사인지를 역설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분열된 유럽이 진짜 위험 — "단결하지 않으면 꺾인다"]
칼라스의 진단은 중국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국·중국·러시아 모두 EU 분열을 원한다”고 경고하며 “이들이 EU를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단결하면 동등한 강대국이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개별 회원국들이 워싱턴과 독자적 협상을 추구하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분열·정복 전략'에 놀아나는 것이라며, 각국이 따로 움직이면 ‘한 다발의 나뭇가지처럼 꺾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칼라스의 '항암치료' 발언은 더욱 입체적으로 읽힌다. 유럽이 중국의 경제 압박에 맞서 살아남으려면 개별 국가의 단기적 이해타산을 넘어 EU 전체가 고통을 공유하며 근본적 구조 전환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프랑스가 강경 노선을 지지하고, 독일이 중국 시장 접근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온건론을 고수하는 한, 유럽의 항암치료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결론 —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자가 필요한 이유]
유럽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위해 구축했던 공급망 모델 자체가 지정학적 위험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중국 의존을 줄이는 과정은 분명 비용 상승과 산업 재편이라는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보조금과 임시방편에만 의존한다면, 유럽은 미래 산업의 주도권마저 잃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칼라스의 발언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중국을 비난했기 때문이 아니다. 유럽이 처음으로 ‘값싼 중국’이 아니라 ‘지나치게 강한 중국 의존’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앞으로 EU가 실제로 공급망 재편과 산업 보호 조치를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이느냐에 따라, 유럽 경제의 미래뿐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 역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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