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 rh201@hanmail.net

1.
지금부터 4년전 5월 8일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친구였고 위대한 시인이었던 김지하는 우리와 영별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지만 가까운 친구의 별세는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한다. 김지하는 내가 대학 시절에 만난 친구들 가운데서 열띤 토론을 자주 나눈 친구였다. 서로 입심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처지들인지라 만날 때마다 한바탕 말쌈 붙었던 일도 이제는 추억의 하나가 되었다. 막걸리 독이나 비우면서 입씨름하던 일이 지내놓고 보면 한낱 허무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했던 것 같다.
김지하는 본명이 김영일(英一)로 문리대 미학과생이었고 나는 정치학과였기 때문에 한때는 친지들 간에 ‘정치 영일’, ‘미학 영일’로 호칭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서로 전공학과(科)도 달랐지만 인생의 지향도 전혀 같지 않았다. 다만 당시 시대의 문제의식이랄까 역사의식을 상당 부분 공유했던 탓에 토론 공방을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芝河는 내 대학 생활의 어느 대목에서인가는 서로 말을 놓고 지낼 만큼 가깝게 느끼고 대화를 나누고 뜨겁게 토론을 벌였다. 芝河와 내가 대화를 나누었던 시기는 아마도 한 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정치학과 컴프렉스가 사라진 후일 것 같다. 정치학과 출신들은 명예 시인 김성우 선배(전 한국일보 시장)의 말처럼 제 잘난 맛에 산다. 엘리트 의식이 차고 넘치면서 타과생(他科生)들과 자기를 차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4.19 시위를 준비하면서도 문리과대학 안에서 정치학과생들만이 우리 시대의 올바른 문제의식을 가진 엘리뜨라는 생각을 잠시도 비우지 않았다.
나는 4.19 당일 각 강의실로 뛰어다니면서 시위 참여를 호소할 때까지만 해도 당시 문리과대학 24개학과(동,식물학과로 부터 천문기상학과까지)생들이 모두 튀어나와 합세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학과가 다른 만큼이나 서로 간에 인생의 가치관도 달랐던 탓이다. 그러나 4.19당일 9시경 교문 앞에는 문리대학생들이 거의 모여들었고 모두 스크램을 짜고 출동 경찰들과 싸울 때는 정치학과 출신들보다는 타과 출신들이 훨씬 더 과감하였다. 경찰들의 발포를 피하여 간신히 학교로 패잔병처럼 돌아와서 벤치에 걸터앉았을 때 비로소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던 학과의식(學科意識)은 송두리째 사라졌고 너나없이 시위에 참가한 문리대생 모두를 “우리들”로 의식하게 되었다. 신학자 Martin Buber의 표현대로 동료 대학생들이 모두 타자(他者) 아닌 “우리들”로 변한 것이다. 이 체험이후부터 나에게는 과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학과가 달라도 동급생이면 누구라도 말놓고 이름을 부르는 관계로 바뀌었다. 나와 김지하의 만남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런데 芝河는 나보다 1년 후배이면서도 만나면서부터 말을 놓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가끔 이형 하는 게 나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그러다가 그는 떠나버렸다.
2.
芝河는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으로 하루아침에 당대의 큰 시인으로 부상했다. 당시 나도 월간 사상계(思想界) 편집장인 사회학과 동기의 황활원의 청탁으로 4.19 혁명 10주년 기념특집에 “4월혁명의 발전론적 고찰”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사상계의 부완혁 사장은 나의 글 속에 “같은 상황, 같은 시기에 일어난 4.19와 5.16을 이제 대립적 관계로만 파악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볼 필요가 있다”는 논지에 발끈, 이영일이 시국에 아첨한다면서 게재금지를 편집장에게 명했다. 황 편집장은 자기가 청탁해서 써온 4.19 10주년 특집 원고를 게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장의 월권이라고 반발, 항의로 사표를 제출해 버렸다. 이 파동으로 4.19혁명 10주년 기념 사상계특집은 깨졌다. 당초 김지하의 담시 5적은 비청탁(非請託) 기고로 내 글보다 부완혁 사장 손에 먼저 들어갔는데 夫사장은 일독한 후 이게 무슨 시냐면서 게재치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편집장의 사직으로 4.19 특집이 깨지는 공백을 매꾸는 응급수단으로 졸지에 芝河의 시를 다시 게재한 것이 월간 사상계가 정간처분을 받고 김지하를 비롯해서 부완혁 사장, 편집기자 김승균 등이 구속되는 五賊詩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구속된 세분과 너무나 잘 아는 처지여서 몇 차례 면회를 다녀왔다. 지하는 얼마 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는 芝河의 일자리를 만들어 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강원용 목사님, 기독교방송의 박형규 상무이사, 청와대의 김성진 공보수석도 만나면서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적당히 피하는 눈치였다. 다만 박형규 상무(목사)만은 CBS방송의 형편이 지하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준이 못 된다면서 함께 걱정을 나누었다. 芝河는 나의 노력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다고 눈치챈 후 나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연락을 끊었다. 뒤에 알고 보니 원주의 지학순(池學淳)주교를 찾아 간 것이었다.
이때로부터 나와 지하의 관계는 끝났고 가는 길도 전혀 달라져 버렸다. 그후 문리과대학 동창들 간의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김지하가 대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가 천재(天才)냐 천재(淺才)냐를 놓고 설왕설래도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즉석에서 한마디로 천재(天才)라고 말했다. 그의 담시 五賊이 만인의 공감을 산 것은 해방된 조국의 지배층들의 가치관 속에 깊게 박힌 부패를 폭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는 Cynical Realism으로 보겠지만 그의 글 속에는 천재가 번뜩였다. 담시 형식으로 발표된 五賊詩는 조선조 5백 년 역사 속의 천민(賤民)들 속에 끼어 엎드려 살다가 사라져간 당대 천재들-탈춤이나 남사당 무리-의 번뜩이는 지혜를 김지하가 비로소 오늘에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그 일은 김지하의 천재적 직관력만이 해낼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내 원고를 게재치 못한 불쾌감보다는 五賊詩를 읽는 감동이 너무 진했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려고 아무 성과도 없이 이리저리 뛰었던 일이 다소 부끄럽지만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3.
그후 김지하와 나 사이에 연락이 끊긴 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란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1980년 9월경으로 기억된다. 내가 장충동의 통일교육원의 원장으로 재임 중일 때 소설가 김승옥이 돌연히 내 사무실로 나타났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김지하가 결혼 후 임신해 놓고 바로 투옥되어 어언 6년이 지났는데 내년이면 태어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면서 입학식에는 그래도 아버지 손목 잡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와 김지하의 과거 인연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정권이 바뀌면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인데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연장이냐 아니면 별개의 정권이냐고 따져 물었다.
김지하는 경제사범이 아닌 국가 보안 사범으로 분류된 모양이었다. 당시 나는 정부의 공직자로 직위는 높았지만 권력직 아닌 연구직이어서 별 힘은 없지만 그래도 인맥을 동원해서 방도를 모색할 테니 내게 맡기라고 답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허문도(許文道)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지금은 고인)을 청와대로 찾아가 나와 김지하 관계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석방의 길을 터보자고 말했다. 그는 내가 마산 교도소로 내려가서 반성문을 하나 써오면 자기가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했다. 나는 한마디로 그에게 반성문을 쓰라는 것은 석방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으니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벌떡 일어서서 나와버렸다. 돌아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지 허문도는 자기가 직접 마산 교도소로 내려가서 김지하를 만나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도 반성문 쓰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벌써 6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지금의 심경을 여기에 몇 마디 적어 달라”며 백지를 내밀었다고 한다. 芝河는 잘 쓰는 솜씨로 “아! 사람은 간사한 것이여! 따뜻한 된장국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이 이처럼 간절한가”라고 적어 주었다고 한다. 허문도에 의하면 김지하 수준의 대시인이 6년 감옥살이의 소감을 이 정도로 썼다면 반성문 이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다른 실세 수석 비서관들을 설득한 후 대통령에게 건의, 마침내 석방했다고 연락해 왔다. 허문도다운 조치였다. 나는 이로써 김지하 문제를 일단 잘 매듭진 걸로 생각했는데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 것은 김승옥이 자기의 산문집(2007) “내가 만난 하나님”속에서 자기의 부탁을 받고 이영일이 김지하 석방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남긴 탓이다. (김승옥 책 P.37)
4.
내가 김지하를 또 만난 것은 그가 2012년 4월 동아시아연구원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로 열린 제1회 현인(賢人) 모임에 첫 강사로 나온 날이다. 이날 강연이 열린 서울역사박물관에는 김지하가 오랜만에 현인으로 나와 강연한다는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 참석했고 이홍구 전 총리(몇일 전 별세)도 맨 앞 좌석에 나와 함께 앉아 강연을 들었다.
거의 1시간 반 정도의 강연 시간에 펫트 병으로 10병이 넘는 물을 마시면서 강연을 이어가는데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강연 도중에 갑자기 자기 신상 문제로 말을 바꾸면서 이 자리에 이영일 씨도 참석하고 있지만 내가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그 운동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빨치산 전력이 있어 자칫 민통(民統)에 손해를 끼치게 될까 봐 참여를 피했다고 말했다.
맨 앞줄에 앉아 자기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나를 의식한 발언 같았는데 그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왜 그런 말을 꼭 해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한 대목이다.
다만 유추해 보면 자기는 시와 글을 통해서는 철저히 앙가쥐망 인생을 살았지만 특정 운동 조직과는 직접 연관을 갖지 않은 점에 대한 자기 변해가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다. 행사가 끝난 후 광화문통으로 둘이서 걸어 나오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그와 나를 맨 처음 연결시켰던 매개체로서의 술을 입에 댈 수 없게 된 芝河와의 만남은 결코 즐겁지가 않았다. 그를 부축해 온 젊은 친구와 함께 나는 길에서 그와 작별했다.
그후 지하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가 토지문학관에서 새로 마련한 집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시인을 사랑하는 모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날도 지하의 건강 상태는 망가진 그대로였다. 운신도 어려웠고 목소리나 표현도 불편할 정도였다. 삶이 길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날 낭낭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했던 부인 김영주 여사는 예상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지하도 그 뒤를 이었다. 그도 팔순을 넘겼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지만 도피와 은둔, 옥살이로 점철된 인생이 건강을 앗아갔고 결국 망가진 몸으로 버티다가 우리 곁을 떠나니 애달픈 삶이 아닌가.
5.
위대한 시인은 살아서보다는 죽은 후에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고 더욱 빛나는 경우가 많다. 레닌의 무덤에 꽃 없는 날이 많아도 푸시킨 무덤에 꽃 없는 날은 없다고 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나와 지하는 대학 시절에는 술벗이고 말벗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나는 국회에 몸담았던 3선 정치인이었고 지하는 인생의 싱싱하고 귀중한 시간을 몽땅 옥중에서 병든 몸으로 보낸 시인이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제부터 김지하의 인생은 역사와 문화가 알아주고 평가하는 긴 생명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기록하는 훌륭한 시인들의 운명이다. 김지하도 이러한 위대한 시인반열에 오를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대목에 그러한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추억이다.
시인을 사랑하는 모임에 참가한 친구들이 그를 회상하는 좋은 글들을 많이 남겨 추모 문집이 발간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글로서 미력을 보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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