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길 whytimespen1@gmail.com

[하바나 공항에 내린 미국 정부기… 60년 만의 극비 접촉]
쿠바 하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미국 정부 전용기가 이륙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미-쿠바 간 고위급 접촉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날 존 래트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하바나를 전격 방문해 쿠바 고위층과 면담을 가졌다. 래트클리프 국장은 이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후통첩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현재 쿠바는 에너지 봉쇄와 전력망 붕괴로 인해 전국적인 정전과 시위가 발생하는 등 정권 수립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로이터통신은 15일, “쿠바 하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미국 정부 전용기가 이륙하는 모습이 로이터 기자에 의해 포착되면서, 미·쿠바 간 고위급 접촉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면서 “존 래트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전날 하바나를 전격 방문해 쿠바 최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가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이어 “CIA 관계자는 이번 방문이 피델 카스트로의 1959년 혁명 이후 CIA 국장의 두 번째 쿠바 방문이라고 밝혔다”며 “그 희소성만으로도 이번 접촉이 얼마나 이례적인지를 방증한다”고 짚었다.
쿠바 정부도 성명을 내고 “래트클리프 국장이 하바나 내무부에서 쿠바 측 관계자들과 회담했다”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는 “이 자리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손자인 라울리토 로드리게스 카스트로, 라사로 알바레스 카사스 내무장관, 쿠바 정보기관 수장이 참석했다”면서 “CIA 수장이 직접 하바나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이 쿠바 내부 상황을 정밀하게 파악한 바탕 위에서 정권에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근본적 변화 없인 대화 없다”… 트럼프의 최후통첩]
래트클리프 국장이 이 자리에서 전달한 메시지는 단호했다. CIA 관계자는 “미국은 쿠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경우에 한해 경제·안보 문제에서 진지하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쿠바는 더 이상 서반구에서 적대 세력의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배경 아래 정보 협력, 경제 안정, 안보 문제가 논의됐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수십 년간 쿠바에 요구해 온 사항은 크게 세 가지다. 국가 주도 경제의 개방, 카스트로 정부가 몰수한 재산에 대한 배상, 그리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실시다. 사실상 쿠바 공산당 일당 독재의 핵심 기반을 내려놓으라는 요구다.
쿠바 측도 즉각 성명을 내고 “양측은 양국 및 지역·국제 안보의 이익을 위해 법집행기관 간 양자 협력 발전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또한 쿠바가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재확인했다. 협력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주권 침해 논리에는 선을 긋는 모습이다.
래트클리프 국장은 “쿠바가 생산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밟아야 할 구체적 조치에 관한 실질적 협의를 시작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CIA 관계자는 이번 쿠바 접촉과 관련해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비교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마두로 대통령을 실각시킨 1월 군사 작전 이후 래트클리프 국장을 베네수엘라로 보내 잠정적 협력 체계를 구축했고, 동일한 접근법을 쿠바에도 적용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3월 “베네수엘라 다음은 쿠바”라고 직접 경고한 바 있다.
[“연료가 단 한 방울도 없다”… 쿠바 에너지 위기의 실상]
래트클리프 국장의 방문은 쿠바가 혁명 정권 수립 이후 최악의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시점에 이뤄졌다. 비센테 데 라 오 레비 에너지·광물부 장관은 13일 밤 국영 TV에 출연해 “연료도, 경유도, 디젤도 절대적으로 없다”며 “보유한 것이라고는 국내 유정에서 나오는 수반 가스와 생산량이 늘고 있는 국내 원유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상황이 매우 긴박하다. 봉쇄의 영향이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으며 여전히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CNN은 “이 위기는 하루아침에 닥친 것이 아니다”면서 “쿠바의 전력망은 16개의 주요 열전 발전소에 의존하는데, 대부분 1960~1980년대 소련·일본·체코 기술로 건설된 것들이다. 설계 수명인 약 10만 시간을 이미 훨씬 초과한 노후 설비들이 이 발전소들의 현실이며, 쿠바의 열전 발전소들은 평균 설비 용량의 34%밖에 가동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CNN은 “3월 말 러시아가 10만 톤의 원유를 기증해 4월에는 일시적인 숨통이 트였으나, 그 물량도 5월 초 소진됐다”며 “이제 쿠바인들은 하루 중 대부분, 때로는 하루 종일 정전을 겪고 있는데, 일부 주민들은 전기 모페드나 휴대전화조차 충전할 수 없다고 토로하며, 짧은 전력 공급 시간을 활용해 빨래와 요리 같은 기본적인 일상을 처리하기 위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처지”라고 밝혔다.
에너지 위기는 전력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유엔 인권 사무소는 “미국의 봉쇄와 이로 인한 연료 부족이 쿠바의 식량 공급을 위협하고 수도 시스템과 병원 기능을 마비시켰다”고 밝혔다. 연료 부족으로 농작물 수확이 불가능해졌고, 유엔 세계식량계획의 구호 활동에도 차질이 생겼다. 쿠바 정부는 학교와 대학을 폐쇄하고 대중교통을 제한했으며, 연료 부족으로 쓰레기 수거 차량이 멈추면서 하바나를 포함한 전국 도시에 쓰레기가 쌓이고 있다.
태양광이라는 대안도 현재로서는 역부족이다. 쿠바는 중국의 투자로 92개 태양광 단지를 2028년까지 건설하는 협약을 맺고 빠른 속도로 태양광 전환을 추진 중이지만, 배터리 저장 시스템 없이는 야간 최대 수요 시간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다. 전력망 위기의 핵심 시간대는 바로 이 야간 피크 타임이다.
[하바나 거리로 쏟아진 민심… “불 켜라” 냄비 혁명]
에너지 위기는 거리 저항으로 폭발했다. U.S. News & World Report는 “지난 13일 저녁, 하바나 곳곳에서 시위가 분출했다”며 “수백 명의 쿠바 시민들이 외곽 주거 지역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쓰레기 더미를 불태우며 도로를 막고, 냄비를 두드리며 ‘불 켜라!’, ‘인민은 단결하면 절대 지지 않는다!’를 외쳤다”고 보도했다. 이는 에너지 위기가 시작된 이래 하바나에서 발생한 단일 야간 시위로는 최대 규모였다.
시위는 5월 12일부터 하바나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레파르토 바이아 주민들은 13일 ‘독재 타도!’를 외치며 냄비 시위를 벌였고, 산미겔 델 파드론 주민들은 지방 정부 청사 앞에서 ‘전기와 식량을!’을 요구했다.
쿠바 분쟁 관측소에 따르면 2026년 4월 한 달에만 1,133건의 시위가 기록됐으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9.5% 증가한 수치다. 이미 들끓던 민심이 5월 들어 에너지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임계점을 넘어선 것이다.
[30년 전 격추 사건의 귀환… 라울 카스트로 기소 임박]
래트클리프의 하바나 방문이 알려진 바로 그날 밤, 트럼프 행정부는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로이터는 미 법무부 관계자를 인용해 “라울 카스트로(94)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에 대한 형사 기소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배심 승인이 필요하지만, 해당 관계자는 “임박한 것으로 들린다”고 말했다. 플로리다 남부 연방검찰청이 이 작업을 주도하며 쿠바 공산당 고위 관리들에 대한 형사 기소 가능성을 폭넓게 검토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소의 핵심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2월 24일, 쿠바 공군 MiG-29는 국제 공역에서 인도주의 단체 '브라더스 투 더 레스큐'(구조의 형제들)가 운용하던 무장 해제 상태의 민간 세스나 항공기 두 대를 격추했다. 이로인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으며,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브라더스 투 더 레스큐'는 1991년 마이애미의 쿠바 망명 공동체가 설립한 단체로, 쿠바를 탈출하는 뗏목 난민들을 구조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을 목적으로 했다. 피습 당시 이들은 국제 공역에서 쿠바 난민 수색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쿠바 조종사들이 민간기임을 알면서도 공격했음을 보여주는 교신 녹취록을 국제사회에 공개하며 “냉혈한 살인에서 쾌감을 느끼는 조종사들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규탄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은 국제법의 명백한 위반이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와 관련해 CBS News는 “라울 카스트로의 직접적인 지휘 책임은 당시부터 물증과 함께 제기됐다”면서 “공화당 의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는 ‘라울 카스트로는 국제 공역에서 브라더스 투 더 레스큐 민간 항공기 두 대를 격추하도록 MiG 전투기에 명령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밝혔다.
CBS News는 이어 “그럼에도 30년간 카스트로 형제는 법적 책임을 피해왔다”며 “이 사건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인물은 쿠바 정보 장교 헤라르도 에르난데스로, 살인 공모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2014년 미·쿠바 포로 교환으로 석방됐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검찰이 기소를 준비했으나 정보당국과 국무부 일각에서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제동을 걸었다는 사실이 30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올해 초 격추 30주기를 맞으면서부터다. 플로리다 주 검찰총장 제임스 우스마이어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수사가 종결된 사실을 파악하고 관련 파일을 즉시 재활성화했다”고 밝혔다.
[외교·사법 동시 압박… 상징을 넘어선 전략적 포석]
CIA 국장의 방문과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기소 추진이 같은 날 이뤄진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쿠바 전략이 단순한 외교적 압박의 수위를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대화의 문을 열어두면서도 사법 카드를 동시에 꺼내 든 이중 전략이다.
라울 카스트로는 2021년 공산당 수장에서 공식 물러났지만 여전히 쿠바 체제의 실세로 분류된다. 그는 미국에 발을 들인 적이 없으며, 미·쿠바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기소는 법적 집행력보다 상징적·정치적 함의가 더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플로리다의 쿠바계 미국인 유권자 사회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쿠바 지도부를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포석이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국제법적 논란을 야기하는 가운데, 쿠바에 제시된 선택지는 명확하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근본적 변화를 택하거나, 연료 봉쇄와 경제 붕괴, 사법 압박을 감내하며 고립을 자초하거나 둘 중 하나다. CIA 관계자가 강조했듯, 그 선택의 시간은 무한정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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