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길 whytimespen1@gmail.com

[독재자의 허장성세 뒤에 숨은 공포, 러시아 전승절의 민낯]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의 최대 국경일인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려는 외국 관리들을 향해 “참석을 권장하지 않는다”며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이러한 경고는 러시아가 고립된 외교 지형을 타개하기 위해 우방국들을 불러 모아 세를 과시하려는 시점에 나왔다. 한때 소련 승전의 영광을 과시하던 러시아 최대 국가 행사 전승절이, 2026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눈치를 보며 전차도 내보내지 못하는 초라한 행사로 전락한데다, 공격자였던 러시아가 이제 자국 영토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처지가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인 키이우인디펜던트는 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일방적인 휴전 협정 위반 시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한 후, 외국 대표단이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열병식에 참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5월 9일 군사 퍼레이드의 운명이 우크라이나 군대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퍼레이드 도중 발생할 수 있는 공격에 대한 모스크바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키이우인디펜던트는 이어 “러시아와 우호적인 일부 국가들이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열병식에 자국 관리들이 참석할 계획이라며 우크라이나 측에 접촉해 왔다”면서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모스크바에 가는 것을 결코 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모스크바에 가는 것은 자유지만 안전은 담보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외국 정상들은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대부분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크렘린 보좌관 유리 우샤코프는 “러시아가 올해 승전 기념일 행사에 외국 정상들을 초청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우크라이나-러시아간 전쟁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에서 공격자는 러시아였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개시한 이후, 크렘린은 줄곧 군사적 우위를 과시해왔다. 그러나 2026년 5월, 그 구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5월 7일 야간 연설에서 “러시아가 전쟁을 이 지경까지 몰아온 결과, 저들의 가장 중요한 열병식조차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서 “이것은 명확한 신호다. 이 전쟁을 끝낼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는 수사가 아니라 현실을 묘사한 말이었다. 러시아가 연중 가장 공들이는 국가 행사인 전승절 열병식이, 적국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위협 앞에 그 형태와 규모를 스스로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젤렌스키는 이 역설을 더욱 날카롭게 꼬집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열병식 개최 허가를 원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한 시간 동안 광장을 행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우리 국민을 죽이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18년 만에 전차 없는 붉은 광장… 굴욕의 열병식]
전승절 열병식은 푸틴 체제의 상징 그 자체였다. 전차,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 최신예 무기들이 붉은 광장을 가득 채우는 장면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연례 의식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이에 대해 키이우포스트는 “러시아 국방부는 ‘테러 위협’을 공식 이유로 내세우며 붉은 광장에서 군 장비 행진을 전면 배제했다”면서 “크라스노다르, 톰스크 등 다른 지역 도시들에서도 유사한 축소 조치가 이어졌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전통적인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대신해 우크라이나 전쟁 참가자들을 행사에 초청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군 장비가 붉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 하다. 크렘린은 ‘현재 작전 상황’을 이유로 들었지만, 분석가들은 장비 부족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퍼름(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극동으로 뻗어 나가는 철도 교통의 요지)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잇따른 드론 공격이 이어진 끝에 5월 9일 자체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가 아예 취소됐다. 퍼름 크라이 주지사 드미트리 마호닌은 “시민 안전 확보와 법 집행 기관이 주민 보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초라함은 장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참석하는 외빈의 수에서도 러시아의 고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키이우포스트는 “지난해인 2025년 전승절에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브라질 룰라 대통령을 포함한 29명의 외국 정상이 참석해 서방의 러시아 고립 시도가 실패했음을 과시하는 무대가 됐다”면서 “반면 올해는 4월 30일 현재 크렘린이 공식 초청 외빈 명단조차 발표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젤렌스키가 전 세계를 향해 모스크바 방문을 직접 경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안보 측면에서 러시아 방문을 권고하지 않는다. 만약 가겠다면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결정이고, 우리에게 보장을 요구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나아가 “러시아가 방화, 폭발 또는 다른 행위를 일으킨 후 우크라이나에 책임을 전가하는 도발을 꾀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방문 예정 대표단들에게 이를 사전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1,500km 심층 타격… 러시아 후방은 이미 전장]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두렵게 만들 수 있었던 물리적 근거는 비약적으로 발전한 장거리 타격 능력이다. 붉은 광장으로부터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내륙 깊숙한 곳이 이미 전장이 됐다.
블룸버그는 “우크라이나군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1,500킬로미터 떨어진 퍼름 지역의 루코일 정유공장을 타격했다”면서 “주요 원유 처리 설비와 기타 장비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추바시야 지역에 대한 장거리 미사일·드론 복합 공격으로 2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했으며, 이 중 1명은 어린이였는데, 추바시야주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밝혔다.
또한 키이우인디펜던트는 “5월 7일 밤에는 모스크바를 향해 수십 기의 드론이 발사됐다”면서 “모스크바 시장 소뱌닌은 자정이 지나자마자 첫 세 기가 격추됐다고 보고했으며, 밤새 총 26기가 격추됐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남쪽 공항 두 곳에는 비행 제한이 발동됐다.
전략분석기관 ACLED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내 에너지 시설 공격이 2026년 4월 들어 전월 대비 두 배로 급증했다”고 분석하며, 이를 “일시적 급등이 아닌 이란 전쟁에 따른 국제 에너지 시장 혼란으로 러시아가 누리는 석유 수입 호황을 차단하기 위해 설계된 지속적 전략 캠페인”으로 규정했다.
ABC 뉴스는 “올해 3월 한 달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발사한 공격 드론 수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발사한 드론 수를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공격 빈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휴전 선언' 뒤에 숨겨진 푸틴의 두려움]
지금의 흐름과 관련해 키이우포스트는 “러시아가 5월 8~9일에 한정한 일방적 휴전을 전격 선언한 것도 이 두려움의 산물로 읽힌다”면서 “러시아 국방부는 전승절 기념 행사를 위해 5월 8~9일 전투 행위를 전면 중단하는 일방적 휴전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모스크바 열병식을 방해하려 할 경우, 키이우 중심부에 대규모 미사일 보복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고 밝혔다.
키이우포스트는 이에 대해 “이는 평화를 위한 제스처가 아니라, 하루짜리 안전을 구걸하는 위협이었다”면서 “젤렌스키는 이를 ‘조작’이자 ‘연극적 퍼포먼스’로 규정하며 ‘러시아의 입장은 모스크바가 진지하게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 퍼레이드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직격했다”고 짚었다.
키이우포스트는 “우크라이나도 5월 6일부터 자체적인 ‘침묵 체제’를 선언했지만, 러시아는 발효 몇 시간 만에 도네츠크, 하르키우, 수미, 자포리자 등 여러 지역에서 1,800건이 넘는 공격을 가했다”면서 “그뿐 아니라 러시아는 지난 4월 러시아정교회 부활절 휴전 32시간 동안에도 1만721건의 위반을 저질렀던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일방적 휴전 제안의 실체는 전투 중단 의지가 아니라, 열병식 당일만큼은 반격을 멈춰달라는 간청에 불과했던 셈”이라 해석했다.
[러시아 영토 안에서 외교관들도 ‘안 움직인다’]
러시아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키이우 주재 외교관들을 향한 황당한 요구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아 자하로바는 지난 6일, “러시아가 ‘불가피한 보복 타격’을 예고하며 키이우 주재 외교공관에 인원을 철수하라는 외교 서한을 5월 4일 이미 발송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키이우인디펜던트는 “침략국이 전쟁 당사국의 수도에 있는 제3국 외교관들에게 피하라고 통보하는 기이한 장면이펼쳐졌다”면서 “그러나 각국 외교관들은 요지부동이었는데, 외국 정부들은 키이우 외교 주재 규모를 축소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고 보도했다
[크렘린의 두려움, 전세 역전이 말하는 것]
전승절은 푸틴 체제가 국내 결속을 다지고 세계에 러시아의 위용을 과시하는 연례 무대였다. 그러나 2026년의 전승절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했다. 전차 없는 붉은 광장, 외빈 없는 열병식, 자국 도시들에서 줄줄이 취소되는 퍼레이드, 그리고 적국에게 ‘하루만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구조.
젤렌스키가 “러시아가 전쟁을 이 지경으로 몰아왔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비꼼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려고 나섰던 러시아가, 이제는 자신들의 가장 상징적인 날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적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 2026년 전승절의 실제 풍경이다.
결국 역사는 침략자의 편이 아니라,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는 자들의 편이다. 젤렌스키의 경고를 무시하고 모스크바 행사장으로 향하는 자들은 역사의 법정에 공범으로 기록될 것이다. 푸틴의 공포가 현실이 되는 순간, 전승절의 화려한 조명은 그의 몰락을 비추는 장례식 불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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