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 rh201@hanmail.net
* 필자 이영일은 대한민국 헌정회 외교통일위원장이기도 하다.
▲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2일 국회에서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 들어가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는 용어는 주식거래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하종가(下種價)중의 하종가다. 심지어는 수구 꼴통으로까지 비하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보수세력의 참모습도, 참된 의미도 아니다.
가. 건국주도세력으로서의 보수세력
그간 한국정치에서 보수세력은 건국과정과 경제발전과정에서 한국 정치를 주도해 왔다. 우선 건국과정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과 호남인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민주당이 대한민국의 초기 건국세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적(Charismatic)리더십과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를 필두로 형성된 한국민주당의 포용력이 결합됨으로 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살벌한 건국반대투쟁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건국(Nation Building)과정은 완성되었다. 건국(建國)에 뒤이어 시작된 북한의 남침과 이를 격퇴시키는 호국(護國)의 과업도 이들 건국세력이 담당했다. 이들은 해방후 87%에 달하는 문맹을 퇴치하고 막대기 기호로 투표방법을 지도하면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접목시켰다. 또 농지개혁을 통하여 농민이면 누구나 지주가 될 수 있는 자영농 체제-세계에 그유례가 없다-를 성공시켰으며 3년에 걸친 공산 남침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반공 민주국가로서의 국민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통 보수세력이 자랑스럽게 외칠 당당한 업적이고 역사였다.
나. 국력배양과 “한강의 기적”
이때부터 시장경쟁 원리에 입각한 경제발전이 시작된다. 4.19이후 헌법외적(extra-constitutional)방법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국민적 숙원인 빈곤 탈출과 후진성 극복이라는 구호를 정치 명분으로 내세우고 국력배양에 민주주의를 종속, 억제하면서 집권 18년 동안 제2차, 3차에 걸친 산업혁명을 주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토대를 구축하였다. 뒤이어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의 1인 장기집권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으로는 단임제(單任制)를 공약, 이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착수했다가 끝맺지 못한 중화학공업(4차5개년 계획 중도에 피살)을 승계 완수하고 88서울 올림픽을 유치, 성공함으로써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는 공전의 업적을 이루어 냈다. 한국정치의 보수세력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건국(建國), 호국(護國), 부국(富國)이라는 상징자산(象徵資産)을 창출하였다.
2. 보수세력의 몰락과 금후의 전망
가. 당명을 바꾸면서 보수정당으로 존속
그간 한국의 보수세력은 한국민주당, 자유당, 민주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자유민주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미래한국당 등 10여 차례나 당명을 고치면서 보수세력으로서의 위치를 지켜왔고 지금은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바꾸어 윤석열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에 대패, 여소야대의 정국을 이룬 가운데 21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 건국 이래 가장 약체화된 야당으로 전락,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선포로 여당인 “국민의 힘”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국민의 힘의 상황대처방식도 비상계엄조치에 못지않게 열등했다. 당면한 위기상황을 차원 높고 슬기롭게 대처, 위기를 극복하는 대신 정권 포기의 길을 골랐다.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108석의 의석을 야당발의의 대통령 탄핵안 저지에 사용치 못하고 탄핵동조에 사용, 국민이 맡겨준 5년 임기의 정권을 3년 만에 포기해버린 것이다.
나. 집권능력의 부재
한국보수세력의 법통을 승계한 “국민의 힘”은 선대들의 노력으로 이룩된 선진화된 국가를 제대로 이끌어 나갈 집권 철학을 세우고 국가를 시대정신에 맞도록 운영할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국이 여소야대 상황으로 바뀐 불리한 상황을 극복, 돌파하는 데 필수적인 내부결속과 효율적인 당정협력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했다. 더욱이 야당이 다수의 힘을 믿고 펼치는 탄핵 공세와 특검 공세를 극복하는데 절실히 요구되는 대응 선전역량도 너무 취약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만 의존하다가 정권수호에 꼭 필요한 거당적 단합과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다. 집권철학과 전략부재
집권여당이 이처럼 무위 무능의 정당으로 전락한 것은 2025년의 한국의 국력과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에 상당(相當)한 집권 철학의 부재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지금까지 남의 나라를 모방하면서 따라잡던 전술(戰術)국가를 넘어서서 다른 나라가 우리를 모방하면서 따라오게 만드는 전략(戰略)국가적 비전을 집권 철학으로 정립하지 못했다. 시대정신에 맞는 집권당으로서의 자기 철학의 빈곤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또 집권 보수정당으로서 “국민의 힘” 당사(黨舍)에는 어느 구석에도 오늘의 한국을 선진국 반열로 끌어올린 당의 상징자산을 지키고 승계하고 있는 당임을 말해주는 구호나 사진 한 장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건국, 호국, 부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통집권세력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는 1998년 미국 샌디에고(San Diego)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참관한 일이 있다. 역대 공화당 출신 정 부통령들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를 앞세운 일단의 당원들이 맨앞으로 나오면서 “미국의 오늘을 만든 링컨을 기억하자”는 아나운서의 맨트가 광장에 울려 퍼지자 참석한 당원들이 일제히 환호하면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은 너나없이 자신들이 자랑스러운 공화당 당원이라는 자부심을 내보이면서 당의 상징 페넌트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리는 지금 국민의 힘 전당대회의 어느 구석에서도 당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적 상징 자산들을 상기하면서 그러한 정당의 당원임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당원을 만나볼 수 없다. 그러한 역사 의식이 당의 철학 속에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 검토해야 할 과제
보수정당으로서 “국민의 힘”은 역사를 가진 정당으로서 시대와 함께 제대로 된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선 당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훈련을 재개해야 할 것이다. 한때 민주정의당에서는 당원교육과 훈련에 역점을 두면서 당원들과 당이 가져야 할 시대적 소명을 공유하도록, 당의 이념과 노선을 공유하도록 훈련시킨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가 바뀌면서부터 당원 훈련이나 교육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당원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연수 시설 마저 매각, 당 운영비로 충당했다고 들린다.
당의 정강정책도 화려한 미사여구는 필요없다. 지금은 근대화=부국(富國)을 향한 변화보다는 근대화 이후 부국선상(富國線上)에서 이루어져야 할 변화를 뒷받침할 강령이나 정책, 복지 Platform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OECD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 노인 빈곤율, 저출산의 인구절벽 문제가 집권당 앞에 놓여진 절실한 과제다. 그러나 이런 실질 문제에 임하는 국민의 힘의 자세는 항상 국민들의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치거나 동떨어져 있다.
또 법치주의의 확립을 통해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헌작업도 필요하다. 개헌을 통해 정치권력의 독재화를 막는 안전장치로서 한국의 경우 양원제나 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도 국민과 더불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과제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 김정은이 내놓은 적대적 양국가론(敵對的 兩國家論)은 결코 대안의 화제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당면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남북한이 각기 가입하고 있는 유엔 무대를 통해 필요한 해법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전쟁 방지라는 국가안보와 분단상황관리라는 측면에서 진지한 논의와 검토가 요망된다. 또 AI를 위한 정책 프렛폼과 청년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할 교육훈련 계획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울러 국민들이 “국민의 힘”에 걸고 있는 기대와 바램이 무엇인가를 꾸준히 추적하면서 필요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정책정당으로서의 면모도 갖추어야 한다. 2025년의 현시점에서 국민의 힘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 무엇인가를 놓고 정책팀들이 날을 지새우면서 토론하는 행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미국 공화당은 전 미국 보수정치연합주도하에 매년 전국적 규모로 미국의 내치와 외교의 미래를 놓고 대규모의 연수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런 연찬을 통해 당원들은 당원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갖는다. 국민의힘 당원들에게 이러한 정체성 인식을 유도하는 수단과 기회는 없다. 오직 기득권만 생각하면서 타성에 젖은 낡은 정당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살아남아 정권 재창출을 기대할 수 있을까.
3. 보수당이 살아나려면?
이제 각급 선거에 입후보할 인사들에게 공천장이나 발부해주는 행정 정당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또 현재처럼 기득권 세력끼리 공천 나눠먹기식으로 당을 운영하는 조직이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의미도 없다. 일하는 정당, 정책이 있는 당으로 변해야 한다. 정권의 수직적 교체의 시대가 가고 수평적 교체가 가시화된 오늘날 집권 철학과 국민의 신뢰받는 정책 정당이 되지 않는다면 불임(不姙)정당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역사적인 집권정당으로서의 “국민의힘”이 당의 전통을 살리면서 새롭게 생존, 발전하려면 우선 당의 상징자산을 관리하는 역사연구실을 만들어 정신무장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나아가 전국적 기초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해나갈 정책연합을 분야별로 구성하고 이를 추진해나갈 일꾼 조직을 서둘러 건설해야 한다. 아울러 각급 선거에 추천할 후보자를 100% 당원의 선출에 맡기는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를 이제부터라도 실시 수범해야 한다.
이러한 갱신(更新-Renewal)을 통해서 당은 거듭나야 한다. 이번 대선 실패의 전말(顚末)을 하나씩 복기(復碁), 반성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할 집권 철학의 재정비, 조직선전 전략의 재정비에 정신적, 물질적 노력을 집중, 투하해야 해야 할 것이다.
[필자: 전 국회의원, 헌정회 외교통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