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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4 12:23:44
  • 수정 2022-10-09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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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의 사랑은 알 수 없는 힘을 준다. [사진=pixabay]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줄고 챙겨야 할 일들은 많아진다는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약 먹기가 아닐까싶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는 여행길이라도 되면 제일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나 내이 세대만 해도 건강을 위해 먹는 약보다는 치료를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혹시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아예 매끼 먹을 약을 분리해 넣을 수 있는 용기(容器)에 준비한다. 4.5일 정도 된다면 열 끼 분 1개로는 안 되어 두 개를 채우기도 한다. 먹는 약의 종류도 많아 내 경우엔 비타민 C까지 하면 한 번에 먹는 양이 열 알은 된다. 약을 잘 못 먹는 사람은 열 번을 먹어야 하는 것을 다행히 나는 한 줌을 통째로 입에 넣어 물 한 모금으로 해결하니 그것도 감사하다.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사실 나도 약 먹는 것을 참 싫어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큰 수술도 여러 번 받게 되고 보니 자연 약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하게 되어버렸고 이젠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엔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자연 한방 처방으로 쓴 약을 한 대접씩 마시게 했었다. 약은 입에 쓰고 또 써야 약이 된다고 생각하던 옛 어른들의 지론이 아니라도 약은 대개 쓰기 마련이었고 몸에 좋은 약이라도 여름 더위를 이기라고 해주는 익모초 같은 것은 유난히 더 썼다.


배가 아파 끙끙대고 있으면 할머니가 무슨 물을 한 대접 가져오시곤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초가지붕에 물 한 바가지를 던져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을 받은 것이었단다. 가뜩이나 비위가 약했던 나는 시큼털털한 맛의 그 물이 그런 것이었다는 걸 알고 헛 구토를 수없이 해댔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에 어떤 성분이 있어서였는지 여하튼 배앓이가 가라앉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 황토로 큰 배를 싸서 아궁이에 넣어 구워 주셨는데 그것을 숟가락으로 퍼먹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구운 배를 먹고 나면 기침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나는 아프지 않을 때도 그 맛이 생각나면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콜록콜록 대며 할머니 눈치를 살폈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신 할머니는 장날이 되면 배 하나를 사다 내 가짜 기침병을 고쳐주시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가신지도 30여년이 되어가지만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해 주시던 그때의 기침약 배 맛이 생각나곤 한다. 언젠가는 흙 대신 신문지로 싸서 전자레인지에 배를 구워 먹은 적도 있다. 하지만 어찌 할머니가 해 주시던 그 때의 그 맛이 나오기나 하겠는가.


또 하나 원기소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원기소는 60-7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소화효소제인데 고소한 맛의 중독성에 국민영양제의 자리를 오랫동안 누렸었다. 선반 위에 올려놓고 한 알씩만 꺼내주던 그걸 더 먹겠다고 의자를 놓고 올라가 몰래 훔쳐 먹다 걸려 혼 줄이 났던 추억 하나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이라면 필히 갖고 있을 터였다. 약이되 서로 더 먹겠다고 했던 아이러니, 그 이상한 약이 회사부도로 없어지고 말았었는데 다시 생산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역시 그 때 그 맛이 날지는 모르겠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제주로 떠나야 한다. 교회 정책당회를 2박3일간 제주에서 한다. 나는 3일간 먹을 약을 챙겨 용기에 넣는다. 아침에 먹는 약과 저녁에 먹는 약이 다르니 그 또한 신경을 써야 한다. 조금 피곤하면 금방 입술이 부르트는 나는 거기에 대비하는 약도 챙긴다. 허리가 안 좋아 파스도 챙긴다. 다른 것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약은 어쩌면 이젠 내 살아있는 동안 같이 가야할 반려인 셈이다.


아프다는 소문이 다 나서 나는 늘 아픈 사람이 되어버렸다. 해서 여기저기 나를 아는 사람들은 좋다는 약들을 보내오곤 한다. 보내면서 아내가 먹으면 좋을 영양제도 같이 보내주는데 아내는 참 약 먹기를 싫어한다. 먹으면 좋다는데도 나나 잘 먹으란다. 자기는 안 먹어도 건강하다나? 건강도 타고 나는 것이라지만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도 이젠 거뜬히 나아 남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고 보면 나도 분명 문명의 최대 혜택이랄 수 있는 그 약의 보은을 입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약 안 먹고도 건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건 먹으려 드는 현대인들의 생각도 조금은 변했으면 싶다.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 말자’라고 했던가. 언젠가 약국마다 붙어있던 표어 같은데 꼭 나보고 하는 소리 같다. 그러면서도 또 저녁에 먹을 약을 챙겨 입에 넣는다. 그와 함께 사는 삶이다.


요즘 며칠 무리를 해서인지 감기 기운도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은데 제주에서 돌아오면 옛날 할머니가 해주셨던 것처럼은 못 해도 전자레인지에라도 배를 구워 숟가락으로 파먹는 추억놀이라도 해 봐야겠다. 그럼 또 모르잖는가. 맛있는 그 때의 맛도 보고 그때처럼 감기 기운도 몸살기도 다 달아나 버릴지. 그 배 맛을 생각하다 보니 가신 지 오래인데도 할머니가 ‘원현아!’ 부르시며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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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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