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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31 16: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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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맏아들이 대를 이어가는 유교적 종법제의 ‘가(家)’의 개념은 거의 자리잡지 않아
-초기 족보는 자녀를 아들딸 구분없이 출생 순서대로 기록. 사위•외손들도 세대 제한 없이 수록
-아들, 딸 구분없이 제사 지내… 재산을 분배에서도 차별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기본 원칙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500년을 문화적으로 동질적이었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특정 시기의 관습과 유물 등을 가지고 조선시대 전체에 대하여 일반화합니다. 가령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며 아내에게 보낸 언문 편지의 내용을 보고 조선시대에도 부부관계가 남편이 전쟁터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애틋하고 애정적이었다고 결론짓습니다. 혹은 1500년대 살았던 신사임당이 강릉의 친정에서 오래 살았던 것을 두고 시부모도 모시지 않았으므로 ‘현모양처’가 아니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전 제가 쓴 글 <수양대군을 변호하며>에서도 얘기했듯이 조선시대 전기에는 맏아들과 그의 맏아들이 끝없이 대를 이어가는 유교적 종법제에 근거한 전통적 ‘가(家)’의 개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건국 이후 1400년대와 1500년대만 해도 조선의 문화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릅니다. 저는 집단이 아닌 개인이 행위의 주체로 인식된다는 의미에서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쓰고자 합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집’을 행위의 주체로 봅니다. 어떤 사람을 알게 될 때 그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의 구성원으로 인지합니다. 예를 들면 친척이 누가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친척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다 말하지 않고 “고모네, 이모네, 외삼촌네, 큰집… ” 이런 식으로 나열합니다. 즉 고모와 고모부, 고모의 자식을 뭉뚱그려서 ‘고모네’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참고로 미국 중산층 백인 계층에서는 친척이 누가 있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Uncle John, Aunt Sara, Cousin Bill, Cousin Amy…” 이렇게 일일이 자기 친척의 이름을 열거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장’이라는 개념은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법제도를 연구한 박병호 교수에 따르면 ‘가장’이라는 용어가 법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성종 때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나서부터입니다. 경국대전 이전에는 가족관계를 부모, 자녀, 남편, 아내, 조부모, 손자 식으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혈연관계로만 파악하였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가장’이라는 법적 개념을 실제로 활용하게 되는 것은 훨씬 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1600년대 중반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가’를 대표하는 가장의 의무와 책임을 규정하는 법령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컨대 가장으로서 집을 잘 통솔하지 못한 사람은 그 전보다 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으며 가장에 대한 범죄는 가장이 아닌 다른 가족에 대한 범죄보다 더 엄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초기부터 정부는 가족제도를 유교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예조를 두어 중국고대의 유교적 의례와 맞지 않는 민간의 관습이나 관행을 고치도록 하였습니다. 사대부들에게는 주자의 ‘가례(家禮)’를 나누어주어 중국 고대의 종법제에 근거한 의례를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는 왕실과 사대부 계층, 그리고 평민들의 습속을 감독하고 교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가령 사헌부에서는 1477년(성종3년) 왕에게 외사촌과의 결혼을 금하는 계를 올렸음이 조선실록에 나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전기의 유교와 법제에 관한 연구들은 많은 유학자들이 중국의 예법을 무조건 도입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급격한 변화보다 고유의 관습을 존중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개인주의적 혈연의 개념은 조선시대 전기에 유학자들이 편찬한 가계기록이나 초기 족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팔고조도와 같은 가계기록은 ‘나’를 기점으로 하여 ‘나’의 조상을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 양쪽으로 고조할아버지까지 추적해 올라갑니다. 족보연구의 대가인 역사학자 송준호가 지적했듯이 팔고조도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서양인의 가계기록과 비슷합니다.

 

반면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활발하게 간행되었던 족보에서는 자신이 속한 부계친족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공통의 부계 조상(현조와 시조)을 찾아올라갔습니다.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세대, 어느 계파에 속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족보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부계친족집단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족보를 편찬하는 일 자체가 유학자 개인이 흥미가 있어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라 씨족원들이 공동으로 발의하고 비용도 공동으로 부담하는 씨족 집단 전체의 일이었습니다.

 

▲ 초기 족보는 아들딸 구분없이 출생 순서대로 기록했다. 사진은 의성 김씨 족보.


초기 족보들은 15세기부터 17세기 중엽 이전에 나온 몇 안되는 족보들을 가리키는데 형식이나 수록 내용에 있어 후기에 나온 족보와 다릅니다. 초기 족보는 자녀를 아들 딸 구분없이 출생한 순서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딸의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니라 사위의 이름을 올렸고 또한 외손들도 세대에 제한 없이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들 딸 차별없이 족보에 올리는 것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자식을 기를 때 아들과 딸을 똑같이 사랑하고 효도를 하는데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의 유학자이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아래와 같이 종법제 이전의 고유의 관습을 옹호합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기를 때 아들과 딸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효성에 있어서도 부와 모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족보에서 딸자식에 대한 애정을 생각하여 그 딸자식의 자손들까지도 다 수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생각하여 그 어머니의 선대도 수록하고 할머니에 대한 효성을 생각하여 그 할머니의 선대도 밝히는 것이 자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송준호의 조선사회사연구, p.30에서 재인용)

 

반면에 후기 족보들은 대를 이어가는 아들들을 출생순서대로 기록하고 그 다음에 딸들을 올렸고 딸의 자손들(외손)은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아무리 딸이 많아도 후손이 없다는 뜻의 ‘무후’로 기록했습니다. 제가 거의 30년 전에 면담했던 노인들은 자식이 몇이냐고 물으면 딸은 세지 않았습니다. 아들 하나에 딸이 셋이면 자식은 하나 밖에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에 사대부 계층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을 때 아들, 딸 구분없이 제사를 돌아가며 지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재산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도 아들 딸 차별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것이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재산을 거의 물려받고 사위가 들어와 사는 관습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 글 서두에 언급한 학봉 김성일이 전장에서 아내에게 보낸 애틋한 편지는 그래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네째 아들이었던 그는 아들없는 집에 외손봉사하는 사위로 들어가 처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아내가 만약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면 전쟁터에서 남편이 부모가 아닌 아내에게 감히 편지를 못썼으리라고 봅니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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