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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조칼럼] 김상곤·김순흥 선배님, 광주일고 교가 지우기를 당장 멈추십시오! 2019-05-01
신광조 whytimes.pen@gmail.com


▲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광주학생의거기념탑 [엽토51 블로그]


김상곤·김순흥 선배님, 미혹(迷惑)의 선동(煽動)으로 벌이는 광주일고 교가(校歌) 지우기를 당장 멈추십시오!


올바른 역사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과거에만 매달려 청산의 일기만을 쓰고 있는 것은 새 역사를 창조하고 오늘보다 나은 세상을 일구는 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두 선배님은 확고한 역사인식으로 일제 잔재청산이 시대적 소명이고 소원이다 칩시다. 그런데 그 적폐 청산 목표와 광주일고 교가를 바꾸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광주일고 교가가 일본의 강점(强占)을 찬양하기라도 했습니까?

대동아공영(大東亞 共榮)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광주 西中생들의 참전을 독려라도 했습니까?


한번 되돌아가봅시다.
광주일고 교가는 1944년 당시 교육계에 계신 이은상 선생님께서 작사하고, ‘어머니의 마음’‘섬 집 아기’‘바위고개’‘울밑에선 봉선화’등 주옥같은 노래를 작곡한  음악교사 이흥렬 선생님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졌습니다.


김상곤, 김순흥 두 선배님께서 광주일고 교가폐지에 앞장 선 것은,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 선생님이 1940년대 중반부터 친일음악단체 대화악단 지휘를 맡았다는 이력을 문제 삼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음악활동은 교편을 잡으며 몇몇 관이 주도하는 악단 지휘자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김동진, 홍난파 선생도 다 비슷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나 항일투쟁을 보면 , 1940년대 초반부터는 그 氣가 꺾입니다.


청과 러시아, 일본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을 모색하던 우리나라는 청일,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자포자기의 모드로 접어듭니다.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시대가 힘의 질서로 자리 잡게 되고, 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는 분위기가 됩니다.


몇몇 분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계속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분들도 계셨지만, 국내에 계신 분들은 순응하거나 울분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고,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자포자기 상태였었습니다.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분들의 태반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셨습니다. 김일성과 김원봉, 김구 등이 대표적 인물이지요.


해외에 나가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활동하려면 몰라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소강상태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천 황현의 자결이 1910년입니다. 김구 선생 후임으로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했던 강산 김용원 선생님도 1934년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이 육사 시인은 1944년, 윤 동주 시인은 1945년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들처럼 죽은 분들은 순결하고, 참으로 훌륭한 위인들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버리기가 쉬웠겠습니까?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린 분들은 그래서 엄청난 위인인 것입니다.
초야에 묻혀 살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세상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조직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시점이고 이상과 현실이 늘 교차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자신의 기질이 강렬한 투쟁의 기운이 없는 사람은 세월을 기다리거나 자신의 하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자발적 친일은 몰라도 강요되거나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친일은 그리 쉽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흥렬 선생은 뚜렷한 친일 기록은 없습니다.
비슷한 무렵 작곡 음악활동을 하다 친일파로 몰려 부관참시 당하고 있는 홍난파 선생은 고문에 못 이겨 일본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기록으로 그 분의 심사를 헤아려 봅니다.


자신의 재산을 사회공헌활동에 주로 사용한 인촌 김 성수 선생도  친일파로 내동댕이치고 仁村路 이름도 지우고 동상까지 다 부수고 있습니다.


자기 가족만이 아니고 수많은 식솔이 딸린 기업체를 이끌고 있는 인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적당히 일제에  협조해주는 척이라도 하면서 험난한 시대를 넘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먹고 살아야 했고 힘을 기르고 싶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는 여유로우면서 늘 타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음악을 하는 분들은 투사도 있긴 하지만 마음이 대부분 여립니다.


정율성 작곡가 같은 분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체화된 분입니다. 자장가 등을 만든, 순수음악을  지향하는 분은 투사가 된다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음악을 하는 분들이 모두 다, 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다 던져버리는‘체 게바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우리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열강 간 힘겨루기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느닷없이 독립이 온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며 독립을 쟁취하려 애쓴 분들의 피와 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맹렬히 하지 않았다고 그 분들에게 역사적 아픔의 책임을 다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 광주일고 교가


[이흥렬 작곡가의 삶의 흔적]


이흥렬 선생은 홍난파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에 피아노, 바이올린이라는 서양 악기를 소개한 분입니다.


함경도 원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이 분의 삶이 투쟁적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집안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일제에 얼마나 협조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출신 성분 때문에 북한에서는 쫓겨난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사회주의는 항일이 보통이고, 지주집안 기독교는 일본과 미온적 협력이 보통이었습니다.


이흥렬 선생은 사상가나 지사·투사이기보다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훌륭한 교육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종군작가의 일원으로서 여러 곡의 군가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에는 ‘봄이 오면’을 만들었고, 초창기에는 자장가 등 동요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노년에는 숙명여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음악에 심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이흥렬 선생님이 만든 노래 중 잊지 못하는 작품은  우리 엄니가 즐겨 부르던 ‘바위고개’와 ‘어머니의 마음’ ‘섬 집 아기’ 그리고 ‘진짜 사나이’입니다.


담백한 가곡을 많이 작곡하여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립니다. 곡조에 슈베르트의 숭어 냄새가 납니다.


선생께서 몇 몇 친일의 흔적이 있는 작품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흥렬 선생은 음악과 조국을 깊이 사랑한 분으로 저는 믿습니다.


수많은 학교의 교가를 만들어주었지만, 자신이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여겨서 무료로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조금은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 광주서중·일고인은 학창시절 내내, 졸업 후에도 우리의 교가를 부르며 청운의 꿈을 키워왔고 자랑스럽게 교가를 부르고 살아왔습니다.


이은상 선생께서 쓴 글이지만, 저는 교가 중“보아라 높이 올린 정의의 등대, 들어라 울려나는 학문의 성종, 일고는 이 나라의 힘, 일고는 이 땅의 자랑‘이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 합니다.


학생 탑 비문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와 함께 제 삶을 관통하고 있는 가슴에 박힌 화살입니다.


이 몇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사느라 제 삶은 힘들었지만, 저는 이 구절을 잊어 본적은 없습니다. 제가 그래도 남에게 부끄럽지 않고 영혼을 잃지 않고 산다면 이 몇 구절 때문일 것입니다.


불란서 ‘마르세이유’ 國歌, 표현도 내용도 어찌 보면 세련미도 없고 비문학적이고 투박하지만 물란서 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랑합니다.


선현들의 얼이 서려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조금만 험이 있으면, 기어이 찾아내서 다 발본색원해서 내 팽개쳐야 합니까?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어라 전통이 되겠습니까?


[더 성숙되고 아름다운 좌파 정신의 참 구현을 위하여]


김상곤 선배님, 김순흥 선배님이나 저는 세상이 오늘보다 내일이 우리의 희생으로 더 나아지고 정의와 평등이 사회 전체적으로 고양되어, 나보다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갈망하는 좌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배님들과는 조금 다르게 꽉 막히고 닫힌 사람이 아니라‘열린 좌파’를 지향합니다.
눈물과 연민이 없는 정의,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정의는 파쇼로 흐릅니다. 분노할 때 분노하는, 아끼고 아끼는  정의감만이 이 세상을 갈등의 바다에서 건집니다.


고집과 아집은 다 버리고 늘 상대방을 배려하여야 합니다.
나의 희생은 나를 주목하게하거나 나를 높이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김상곤 선배님의 ‘자립형 사립고’나 ‘과학고, 외국어고’ 줄이기 생각에 반대합니다. 교육은 수월성과 보편적 평등이 잘 조화되어야 합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교육의 성취목표인 것입니다.


저는 민족사관학교를 세운 최명훈 파스퇴르 회장과 수학의 정석 책을 팔아 전주상산고를 세운 홍성대회장의 절규에 가슴 아팠습니다.


그 분들은 나라의 미래가 인재 양성에 있다고 보고, 사재를 털어 육영사업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교육행정가들에게 절망하고 있습니다. 대안학교도, 영재학교도, 일반학교도 다 소중한 것입니다.


도식화되고 관념적인 세상 현상 접근법이 이번 광주일고 교가 폐지의 사고의 출발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김순흥 선배님은 늘 올곧은 세상을 지향하는 바른 분으로서 존경합니다.
그러나 선배님의 일반적인 세상문제해결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일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98년인가 광주시 문화예술과장 시절, 광주시에 이름표를 붙이는 이미지통합(CI)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CI작업의 첫 출발은 광주를 10자 이내로 표현해보는 일 이었지요. 정찬용선배님 그리고 선배님 등 누구보다 광주를 사랑하고 고민하는 분들을  제가 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선배님등은 무조건 ‘5·18 민주 인권도시’를 표제로 내새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운동권에서 굴러먹은 제가 왜 그 높은 뜻을 모르겠습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지인이 보기에는 강성이고 회색인 도시 광주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 때 선배님들께 서운했던 것은 무조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외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었습니다.


선배님들은 저를 5·18의 고귀함도 모르는 정신 나간 놈으로 취급하고 사정없이 저를 비난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광주를 찾는 외지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고 싶어 제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광주에 가장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 포용·관용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빛과 생명의 도시, 광주’를 끝까지 사수(死守)한 것입니다.


얼척 없는 놈이라고, 너무나 강하게 저를 비난하기에, 제가 울먹이며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아픈 새는 함부로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습니다. 삼키고 삼킬 뿐입니다. 그러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통곡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같이 울어 달라고 할 권리가 우리는 없습니다. 5·18에 같이 울어달라고 할수록 그들은 도망갑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늘 당신들보다 하루빨리 너희들의 잘못을 깨달으라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늘어나기를 바랄지언정, 강요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 승일해야 극일이 된다고 봅니다. 물봉 정신으로 좀 져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광주일고 교가 청산!
교가 탄생에 무슨 사연이 있는 줄도 실제로는  모르면서, 우리가 대단한 정의의 사도인 양 자위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봅니다.


설령 조금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감싸 안아야 한다고 봅니다. 따지고 보면 광주일고 교가에 아무리 찾아보아도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일고 교가를 만든 동기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교가가 사라지면 광주일고 야구팀을 응원할 때 응원가만 부를 것입니까? 재학생은 교가를 부르고 졸업생들은 입 다물고 서 있을 것입니까?


과거는 교훈으로 삼는 것이지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뛰는 자만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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