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whytimes.pen@gmail.com
▲ 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2025년 4월 17일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 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을 만났다.[사진=미 국무부]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1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이 중재 역할에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협상 당사자들과 유럽을 동시에 압박하고 나섰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파리에서 "양측이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돕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며 "미국은 다른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휴전이 양측 간 이견으로 진척이 없다면 발을 뺄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 발언은 최근 평화 협상 진행이 지지부진한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취임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공언하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자신했다.
취임 직후엔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톱 다운' 방식으로 협상에 나서며 실제로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 중단 카드를 쓰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해 30일간의 무조건적 휴전안에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대로 양측은 에너지 시설에 대한 상호 공격만 30일간 중단한다는 부분 휴전안에 지난달 25일 합의했다.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8일 별다른 성과 없이 기한이 만료됐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향한 러시아의 미사일·드론 공격이 계속 이어져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트럼프의 휴전 중재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러시아에 시간만 벌어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이 교착된 건 양측 모두 근본적인 입장에 변화가 없는 탓이다.
러시아는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에 더해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점령한 도네츠크, 루한스크, 헤르손, 자포리자 지역을 국제사회가 러시아 영토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포기,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 해제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한 치의 영토도 포기할 수 없다"며 어떤 형태의 양보나 타협도 거부하고 있다. 또 전후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기 위해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나 최소한 미국 등 서방 동맹이 명확히 안보 보장을 약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중재자로 나선 트럼프 정부로선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루비오 장관의 이날 발언은 특히 영토 사수를 고수하는 우크라이나에 현실적인 타협을 촉구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11일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고 온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는 이후 미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휴전 합의가 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헤르손·크림반도 등 '소위 5개 영토'에 달렸다고 말했다. 휴전을 위해선 사실상 이 허들만 넘으면 된다는 취지다.
러시아로서도 루비오 장관의 발언을 흘려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말 NBC 인터뷰에서 휴전 협상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에 불만을 드러내며 러시아가 합의하지 않으면 러시아산 원유에 2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광물 협정 체결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에 추가 무기를 지원하며 러시아에 군사적 부담을 가중할 수도 있다.
전날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 우크라이나 종전안을 두고 처음 정식으로 머리를 맞댄 유럽 국가들로서도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위트코프 특사는 우크라이나를 설득해 러시아의 점령지를 양보하도록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실 관계자도 전날 파리 연쇄 회담 이후 "휴전 협상은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고 폴리티코 유럽판이 전했다.
이와 관련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지난 1월 초 프랑스 대사들의 신년회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영토 문제에 대해 현실적으로 논의해야 하며 이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현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만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해 유럽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인의 의지에 반한 국경 변경은 있을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차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파리 회담이 끝난 시점에 맞춰 키이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위트코프 특사의 우크라이나 국경 관련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의도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트코프 특사가) 러시아의 서사를 퍼뜨리고 있다"며 "그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관해 논의할 권한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