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목 whytimes.pen@gmail.com
▲ [사진=Why Times]
얼마 전 저녁 산책을 나가다가 아파트 내리막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뼈에 골절상을 입어 오른 손으로 밥도 먹을 수 없고 생활하는 데 상당히 불편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아픈 상처도 마침내 낫는다는 평범한 진리도 터득했다. 만약에 사람에게 팔꿈치가 없다면 팔을 굽혀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입으로 먹든지 다른 사람이 먹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니 사람의 몸을 이렇게 만들어 준 조물주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는 나도 많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지나간 삶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보는 기회도 되었다. 퇴직한 지 어제 같은데 강산이 변할 정도의 세월이 흘러서 생계(生計(덧말:생계)) 시기를 훨씬 넘겨 이제 노계(老計)를 넘어 사계(死計)까지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을 느낀다.
중국 송나라 때 주신중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인생에는 다섯 개의 계획(五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생계(生計), 둘째는 신계(身(計), 셋째는 가계(家計), 넷째는 노계(老計), 다섯째는 사계(死計)가 그것이다. 생계(生計)는 살아가며 내 일생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고, 신계(身計)는 몸의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의 계획이며, 가계(家計)는 내 집안과 가족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노계(老計)는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고, 사계(死計)는 마지막으로 어떤 모양으로 죽을 것인지 하는 문제를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한 어부가 10 길(尺)이나 되는 거대하고 큰 어망을 짜는 일로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물었다. 그렇게 큰 어망을 바닷가에 들고 나갈 수도 없고 가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펼칠 수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데 왜 그렇게 엄청나게 커다란 어망을 짜고 있느냐고 하자, 어부는 “내가 그간 어망을 한 올 한 올 짜면서 내 목숨이 길어졌는데 쓸모없다니? 이 어망은 손발에 힘이 빠져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된 50세부터 짜기 시작해서 이제 내 나이 70까지 짠 것이오. 나는 앞으로 20년은 더 짤 생각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화는 주신중의 “노계론(老計論)에 나오는 얘기다. 나이 들어 할 일을 미리 준비해 무료함이나 소외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려면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수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해서 이 어망을 특히 ”연수망(延壽網)이라고 부른다, 즉 노후를 대비하고 늙어서 할 일들을 미리 마련하여 소외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는 인생작업을 상징적으로 연수망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는 처음에는 순수한 봉사활동으로 시작하다가 결국은 출세와 권력욕을 위한 위선적인 봉사활동으로 끝을 내는 사례가 많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외국에 나가 조용히 나만의 연수망을 짜면서 즐겁게 여생을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니 나도 내가 계획했던 연수망에 대해 다시 한 번 회고해 본다. 나도 퇴임하기 오래 전부터 단기 연수망과 장기 연수망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며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단기 연수망은 퇴임 후 몇 년 간 중국에서 외국인 교수로 활동하는 것이었고, 장기 연수망은 중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노후를 지낼 계획이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동양의 정신 가치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동양학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했고, 마라톤도 하면서 체력을 키워왔으며, 중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는 퇴임을 앞두고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연수원에 다니기도 했다. 퇴임 이후에는 외국의 대학, 가능하면 중국에 소재하는 대학에 진출하여 몇 년 간 학생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바로 퇴임 다음 달부터 중국의 한 대학에서 초청해줘서 그 대학에서 3년 동안 외국인 교수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곧바로 한국방송 통신대학 중어중문과에 입학하여 장기 연수망 준비에 들어갔다. 젊은 학생들과 함께 중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공부를 지속했고, 아울러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위한 준비로 집 근처에 텃밭도 마련해서 원예와 농사 경험도 쌓았다. 통신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노인타운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입학하여 계속 중국어도 공부하고 컴퓨터와 핸드폰 활용법도 수강하고 헬스센터에서 체력훈련도 했다.
이제 중국에서의 노후 생활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마무리 되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돌발 상황이 닥쳤다. 갑작스럽게 아내와 내게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뇌경색이 와서 입원하게 되었고, 아내는 그 간의 치매 증세가 심해져서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뇌경색 증세는 끊임없는 재활훈련으로 거의 회복되었지만, 뒷동산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바닥났다. 자녀의 권유로 지금은 서울로 거처를 옮겨 아내를 보호하는데 주력하면서 짬을 내어 시간 나는 대로 산책하며 체력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의미 있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부부가 모두 병약해져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소일거리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여 평소 생각해 왔던 주제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심심풀이로 무리하지 않으면서 쓰다 보니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 1년의 세월이 더 흘러 3년이 되면 글을 쓰는 일도 끝날 형편이다. 벌써 내 나이 80이 가까워져 앞으로 해야 할 응급 대체 연수망도 곧 끝날 것이라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다.
내 본래 장기 연수망은 퇴임 후 아내와 함께 중국에서 노후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이미 중국에 내 명의로 아파트도 준비해 놓았다. 중국에서 지역 봉사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재미있게 보낼 계획이었다. 아내가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에 취미가 있어서 현지 중국인 인부 한 명과 함께 자그마한 꽃밭을 일구며 꽃을 재배할 계획이었다. 그런 후에 손수레를 이용하여 지역 동네 공중화장실에 매주 꽃 화분을 교체하여 가칭 “깨끗한 화장 문화 가꾸기”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경비의 일부는 화분에 공익광고문을 써 넣어서 광고 찬조금도 마련하려 했다.
그 지역에 진출해서 사업을 하고 있는 대학동문회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상공인의 협조를 받기로 이미 약속을 해두었다. 꽃 화분에 “한국xx대학동문회”, “한국상공인 xx지회”등과 같은 스티커를 붙여 공익광고의 의미를 부각하려 했다. 지역 공중 화장실 환경도 깨끗하게 미화하고, 한국의 특정 대학과 한국 기업의 이미지도 제고시키고, 나도 지역 봉사활동을 즐길 수 있는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역사회 가꾸기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아내와 나에게 찾아온 병마로 퇴임 후의 중국생활 계획은 전면적으로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마련했던 아파트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수년 동안 실천했던 중국 지역대학에 지급했던 약간의 장학금 지급, 한국어 독서실 운영, 한국어학과 연구소 실립 계획, 한중 역사문화 발굴 국책 과제 준비 등등 중국의 몇몇 대학과 쌓았던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만들었던 세상 삶의 길과 진리를 담은 그릇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 한 번 꺼내 보고 싶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평생 빚은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한 것인지 그래도 냉면그릇 정도는 되는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큰 그릇이 보이는 언덕까지는 와 있는지, 큰 그릇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냉면그릇은커녕 그런 그릇은 보지도 못한 채 사계(死計)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큰그릇은 늙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이룰 수 없는 그릇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핑계가 되는 것 같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은 노자(老子) 도덕경 41장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는 여기서 도(道)를 설명하는데 “매우 밝은 도는 어둡게 보이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가장 평탄한 도는 굽은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몹시 흰 빛은 검은 것 같고, 매우 넓은 도는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다. 아주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매우 질박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아주 큰 사각형은 귀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大器晩成),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大音希聲),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象無形)고 했다. 왜냐하면 도는 항상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긍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에서 보듯 만성(晩成)이란 본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거의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노계론에서 언급된 어느 노인이 짜고 있던 연수망은 어차피 고기를 잡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고기를 잡을 생각도 없이 그저 외로움을 달래고 소일할 수 있는 일로, 핵심은 건강과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충분히 다한 것이다.
나의 장기 연수망 또한 비록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위해 수십 년간 많은 친구들과 교류했고 많은 활동을 한 것 자체로 큰 삶의 의미와 활력을 갖게 한 일이었다는 점에서 내게도 그 덕택으로 건강과 수명이 이만큼 유지될 수 있었던 연수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단기적인 연수망은 실천했지만 장기적인 연수망은 몇 년 간 계획만 하고 실천은 못하는 아쉬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돈을 써가며 하는 취미활동도 결국에는 신체의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을 위한 것처럼 노계를 위한 일 자체가 육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적 건강에 도움이 되어 건강과 장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연수망 역할을 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겠다.
노인들도 일이 없으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만들어야 한다. 자기의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활동을 찾고, 책을 읽거나, 산책이나 운동과 같은 취미활동을 하거나, 아침에 동네를 청소하거나 학교 앞 로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거나,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거나, 이것도 저것도 할 일이 없으면 노인정에서 친구들과 수다라도 떨어야 한다. 허구한 날 잘 나가던 젊었던 시절을 자랑하며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막걸리 한 잔 마시며 후회와 서러웠던 과거 삶을 푸념한다고 건강과 장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쓸데없이 무위도식하며 노인 대접 받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일 자체를 만들어 즐겨야 한다.
일에 대한 목적이 돈을 버는 것과 관계되면 더 좋겠지만, 연수망을 짠 노인처럼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효(孝)라는 글자가 노인(老)을 자식(子)이 업는 형상으로 무조건 보호만 하는 것이 효인 것처럼 해석되지만 현대적인 뜻은 항상 소일할 수 있는 연수망을 찾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주는 것을 진정한 효라 하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활동할 수 없을 때까지는 쉬지 말고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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