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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목 칼럼] 빠름에서 느림으로 가는 길 2024-06-07
이종목 whytimes.pen@gmail.com


▲ [사진=Why Times]


집 바로 뒤에 산속 숲길이 있지만 체력의 한계로 나는 항상 앞에 있는 홍제천을 산책한다. 물도 깨끗하고 나무도 많아서 산책하기에 참 좋다. 오늘은 평소 걷던 산책길을 벗어나 조금 더 멀리 걸었다. 상명대학교 부근에 대한불교 조계종의 옥천암과 자그마한 암자가 있다. 암자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냇가에는 몇 마리의 야생 오리 떼가 한가롭게 놀고 있다.


나는 문득 저들 오리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 동안 사색에 잠겨보았다. 그리고 이내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었고 그동안 너무 빠르게 앞만 보고 쉼 없이 뛰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살아온 과거를 생각해 보니 그동안 조금 천천히 지냈다면 지금 이렇게 병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후회와 같은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사회적 분위기는 빨리빨리 문화였다. 군대에서도 늘 삼보 이상 구보였고, 식사 시간도 몇 분을 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빠른 문화는 급격한 경제성장은 물론이고 치열한 삶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 정신적인 문화가 되어버렸다. 경제적 면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긍정적 결과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빠른 시간에 원하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대충, 대략, 대강, 적당 등과 같은 의식이 노동과정에 스며들게 되었다. 결국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급하고 빠른 성격을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약효가 가장 빠른 것은 아마 낙지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의 말에 낙지는 쓰러진 소도 벌떡 일어나게 한다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낙지에는 지방성분이 적고 타우린, 무기질, 아미노산 등 영양이 풍부하게 있어 조혈강장 뿐 아니라 칼슘 흡수와 분해도 돕는다.


그러나 낙지가 소의 입에서 목에도 넘어가기 전부터 원기를 회복했다는 말은 너무 지나치다. 풀을 주식으로 먹는 초식동물인 소의 입에 갑자기 살아 있는 낙지를 넣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것인데, 마치 낙지가 소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약발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나도 매주 낙지로 끓인 연포탕을 즐겨 먹는데 소의 약효처럼 혹시나 헤라클레스가 될까 걱정이다. 이러한 낙지 약효는 이미 세계에서 제일 빠른 기네스북 기록이 될 것 같다. 우리의 지나치게 빠른 마음에 대한 과장된 대표적인 표현이다.


1970년 4월에는 서울에 건설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서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부상을 입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1994년 10월에는 한강의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시민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하였고, 그중 32명이 익사하였다.


그 이듬해인 1995년 6월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501명이 사망하게 되었고 937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제적 안정수준에 빨리 오르기 위해 주식, 복권, 다단계 판매, 가상화폐까지도 투자하는 열풍에 휩싸여 있다. 간혹 양심까지도 저버린 악의적인 사람은 선량한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보이스 피싱도 불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조급한 한방 심리가 아닐 수 없다.


빨리빨리 문화는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번듯한 건물이 아니어도 십자가와 종탑만을 세워 놓아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산과 들 그리고 골짜기마다 판잣집으로 지은 기도원이 들어섰다. 길거리와 버스, 지하철 안에서는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라고 외치는 전도사가 넘쳐났다. 목회자들은 너도 나도 초대형 교회건물을 신축하는데 두 팔을 걷고 나셨다.


열림과 닫힘의 기능이 자동인 승강기를 타고서 연신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짜증을 내곤 했다. 국제선 비행기가 공항의 계류장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승무원의 적극적인 안내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들처 매고 접은 통로에 서성이는 사람은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먹거리 문화에서도 라면을 세계적 즉석식품으로 대중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개발과 빠른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뒤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느림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레저 분야에서 빠름에서 느림의 미학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시대가 되면 운동이라는 레저에도 빠른 마라톤이 유행한다고 한다.


내가 1994년도에 중국 심양에 있는 요녕대학(遼寧大學)에 교환교수로 있을 때 저녁마다 운동장에서 조깅을 즐겼는데 그럴 때마다 나를 아는 중국인 교수들이 배가 꺼질 텐데 뛰지 말라고 말리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당시에는 레저 활동보다 먹는 것이 더 절실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국민소득 15,000달러를 넘어 30,000달러에 이르면 빠른 운동에서 느린 운동으로 변화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느덧 유행하는 운동이 ‘걷기’로 바뀌었다. 우리 사회도 지금 이런 흐름에 와 있는 것 같다. 마라톤과 힘이 많이 소요되는 등산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다가 어느 순간부터 점차 ‘걷기’로 취미가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도보 답사가 열풍이어서 해남에서 통일 전망대나 판문점까지, 강화도에서 강릉으로 가는 횡단 도보 답사길도 유행이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긴 코스는 50여 개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는 부산 오륙도에서 출발해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에 달하는 해파랑길이라 한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화 나들길, 변산 마실길, 소백산 자락길, 고창 선운산 질마재길 등도 잘 알려진 도보 답사 길이다.


나도 나이를 먹고 퇴직한 후부터 산책이 하루 일과의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보통 하루에 두 차례 산책을 하면서 매일 8,000보 정도를 걸으며 느림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보통 속도로 50분 정도 걸리는 길을 점심 때는 천천히 여유를 갖고 2~3시간 걸으면서 쉬면서 생각하며 자연을 즐기며 글도 메모한다. 저녁때에는 1시간 정도의 보통 속도로 걷는다.


하루 몇 보나 걸어야 좋을까? 미국 하버드의대 안소니 코마로프 박사 팀은 평균 나이 72세인 여성 집단 17,000명을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연구했다. 제일 활동적인 그룹들은 하루 8,442보를 걸었고, 다음으로는 평균 5,905보를 걷는 그룹이 뒤를 이었다. 세 번째 그룹은 4,363보를 걸었고, 활동량이 제일 적은 그룹은 하루 2,718보를 걸었다. 4년에 걸친 추적 관찰 기간 동안 걷기와 사망률 사이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런 결과 하루 7,500보를 걷는 집단들은 하루 2,700보 정도를 걷는 집단들에 비해 사망할 위험이 약 40%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에 따르면 7,500보 이상 걷는다고 건강에 더 좋은 점은 생기지 않았다. 얼마만큼 활기차게 걷는가 하는 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집단들과 빨리 걷는 집단들의 건강상 특이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퇴임한 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흘렀고, 이제 지금은 조용히 산책하면서 가끔씩은 벤치에 앉아 과거를 뒤돌아본다. 세상사에 대해 그렇게 아는 것도 없으면서 겉으로 아는 척했던 나의 과거를 알고부터 쑥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누가 알찬 삶의 방식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지 겁부터 난다. 지금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느낌만 든다. 솔직히 내가 나에 대해서도 상세히 모르겠는데 남의 삶에 대해 어떻게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길에는 수많은 길이 있기 때문에 살다보면 세월이 답이 되어 줄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책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가슴으로도 조금은 그 뜻을 이해할 것 같다. 어느 노래 가사에 나이를 먹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래가 가슴에 와 닿는다.


지식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좌반구를 통해서 이해되지만 지혜는 우반구를 통해서 가슴으로 익히고 성숙시켜야 느껴지는 것이다. 좌반구 뇌로부터 가슴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30cm에 불과한 짧은 거리지만, 뇌라고 하는 머리로만 알게 된 지식을 가슴으로 그 의미를 느끼고 익히고 성숙시켜 지혜라는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거의 30년 이상의 긴 세월이 흘러 익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겨우 1cm 익으면서 가슴으로 내려간다. 20~30세부터 인생의 철이 들기 시작한다고 하면 50~60의 나이가 되어야 삶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육체적인 나이는 20대 초반까지 성장하다가 40대에 갱년기를 거쳐 늙어가지만 정신적인 연령은 인생의 70~80대까지도 성장한다고 한다. 미국 월간지 션샤인 발표에 의하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들의 35%는 60~70대에 이루어졌고, 23%는 70~80대에, 6%는 80대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결국 60세가 넘어선 노인들에 의해 세계 최대업적의 64%를 성취해냈다는 계산이다. 늙은 후에 지혜를 다시 한 번 더 익히게 되면 정말로 노숙하고 노련해져서 도사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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