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1-06-06 16:38:42
기사수정

▲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현충문 초병들이 근무 교대식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오늘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다가 먼저가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 받고자 제정된 제66회 현충일이다.


그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탁월한 외교능력으로 미국 주도의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북한의 기습남침을 막아냈고 이후 굳건한 한미동맹으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자유를 지키는 초석을 깔았다.

뒤를 이어 박정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대통령까지 함으로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산업화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러한 번영과 자유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피의 희생이 없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고, 지금의 북한 김정은 체제에서 빈곤과 억압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유엔군과 미국의 희생이 얼마나 컸나를 반추하면서, 북한군과 유엔군의 첫 교전인 죽미령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숨져간 그들의 희생을 기르고자 한다.

죽미령은 경기도 오산부근에 있는 죽미고개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진, 북한 공산군과 유엔군 (일명:스미스 특수임무대대)과의 혈전을 죽미령 전투 또는 오산 전투라 부르기도 한다.

(죽미령 전투)
대나무가 우거져서 아름다워서 죽미고개라 당시에 불리우던 고개위로 붉은 피가 쏟아진 것은 71년 전의 일이다.


'쿠쿠쿠 구루' 궤도소리를 울리며, 공산군의 기습이 시작된지 10일째인 1950년 7월5일 오전 7시. 이틀 전 한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한 북한군 105전차사단의 예하 연대가 수원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한을 집어삼키려는 속전속결의 전략이었다.


옛 소련제 T-34탱크 33대가 내는 궤도소리는 우렁차고 너무도 요란했다.


후방에는 북한군 제4사단 소속 보병 5,000여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같은 날 오전 8시 16분 '슈웅~ 쾅!'하는 죽미령 고개 주변 반월봉과 92.99고지에 미리 진지를 구축한 미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의 105mm 야포가 먼저 불을 내 뿜었다. 일사천리로 남하하던 북한군에게 미 제24사단 소속의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의 첫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스미스 부대는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고, 사단장은 딘.소장이었다. 스미스 부대는 한국전에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 소장은 미 24사단장인 디.소장에게 전세가 급격히 불리한 상황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 또는 지연시켜야 낙동강을 방어할 수 있는 1차,2차,3차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고, 유엔군과 한국군으로 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강조하면서, 딘.소장이 이끄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하여금 죽음을 담보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스미스 부대는 초대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이 이끄는 8군 산하 연대 보병과 포병 대대 병력 등 540명으로 구성되었고, 최초로 한국전에서 첫 전투를 치른 지상군이었다.


하지만, 특수임무 부대라고 하지만, 장비 면에서는 북한군에게 너무나 열악한 전투 장비였다. 그리고, 북한군이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전쟁준비를 했으리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북한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부분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특수임무 부대라는 명칭에 걸맞게 T-34 탱크를 바주카 포 등을 사용하여, 4대를 잡았지만, 대전차 포탄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고, 이미 북한군의 장비와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스미스 부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스미스 부대가 전멸할 위기에 봉착하자,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라는 명령이 교전 시작 6시간 15분 만인 오후 2시 30분쯤 떨어졌다.


이날 전투로 스미스 부대원 56명이 사망했고, 포로로 잡힌 89명 중 39명도 죽임을 당하거나 사망했다.


북한군은 5,000여 명의 병력 중 42명이 숨지고 8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유엔군의 첫 전투는 북한군에게 패배한 전투가 되었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가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6시간의 북한군 기갑사단의 공격을 지연 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낙동강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인천상륙작전과 장사상륙작전을 성공시키도록 하는데 큰 역활을 하여 겉으로는 패배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금은 죽미령 전투를 기리고,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현재 죽미고개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운영 중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 특기할 점은 죽미령 전투의 패배로 부대와 떨어져 계속 남으로 탈출하다가 한국의 한 민간인이 작은 포상금에 눈이 멀어 숨어든 미 제 24사단 사단장인 딘.소장을 밀고해 결국 포로로 잡혀 3년 간의 학대를 이겨내며 포로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져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있었음에 씁쓰레한 맛과 함께 서글픔에 눈시울이 적신다.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먼저가신 호국영령과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피로써 지켜준 유엔 참전국 및 특히 미국의 한국전 참전 용사들에게 한없는 경의를 표하며 옷깃을 여민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8742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 전,한국검경신문사 보도본부장 겸 논설위원장
    전,새한신문(현,새한일보사 )부사장
    전,소셜네트웍기자협회 고문
    현,국제언론인클럽,사단법인 한국언론사협회 논설위원 등재
    고정칼럼:송재영의 우이독경
    전,4대개혁추진국민운동 본부장
    전,국민행복당 중앙당 초대사무총장.
    현,자유한미연합 상임대표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최신 기사더보기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