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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제2의 톈안먼 사태" - 6월 4일 톈안먼사태 32주년, 中 결사적으로 추모 분위기 막아 - 중국 반체제 운동의 기원이 된 톈안먼 사태, 中은 곤혹 - 지금도 이어지는 톈안먼 정신, 중국 민주화 열망 뜨거워
  • 기사등록 2021-06-04 13:47:27
  • 수정 2021-06-04 18: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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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안먼 사태를 보여주는 이 한 장의 사진 [사진=Why Times DB]


[6월 4일, 톈안먼 사태 32주년]


1989년 봄,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사망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번져간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가 6월 4일로 32주년을 맞는다.


개혁주의 성향을 보이다 1987년 실각한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4월15일 사망하면서 촉발된 톈안먼 사태는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주도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져갔다.


시위대의 규모가 늘어나자 중국 지도부가 당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5월17일 밤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자택에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와 리펑(李鵬) 총리 등 모두 7명이 회의를 열게 된다. 이 자리에서 자오쯔양 총서기와 후치리(胡啓立) 상무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력진압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5월20일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과 리펑 총리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주도하여 6월3일 밤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대에 대한 해산에 나서게 된다.


사실상 중국 역사를 뒤집을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던 톈안먼 사건을 중국은 ‘폭란(暴亂)’으로 규정한 반면 서구 사회는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한다.


중국 당국이 발표한 공식사망자는 319명이지만 훗날 공개된 미국과 영국의 기밀 문서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1만명까지로 보고될 정도로 참혹한 사건이었다.

이날 이후 무력진압을 주도한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태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내놓았지만 평당원 신분임에도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추앙받으며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1997년 2월 사망했다.


더불어 강경진압을 주도했던 또다른 인물인 리펑 총리는 20여년간 탄탄한 지위를 누리다 1998년 주룽지(朱鎔基)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권력 핵심에서 물러났다.


반면 무력진압에 반대했던 자오쯔양은 이 일 이후로 17년간이나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2005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자오쯔양은 톄안먼에서의 민중 시위를 애국적이라 평가했으며 가택연금 되었을 때 집필했던 ‘국가의 죄인’이라는 회고록은 2009년 5월 발간돼 전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중국 반체제 운동의 기원이 된 톈안먼 사태]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는 그로부터 중국의 반체제 운동이나 민주화, 인권운동의 기원이 된다. 톈안먼 사태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요람인 셈이다.


2009년 자오쯔양의 회고록 출간 이후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 중국이 직면하게 되자 원자바오(溫家寶)총리의 유럽 순방에 맞춰 반체제 인사의 대명사인 이들을 잇달아 석방하면서 이들은 중국 민주화의 불씨가 되어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특히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지난 2010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자극제가 되어 중국을 향한 반체제 인사들은 더욱 활동의 폭을 넓혀 왔다.


반면 중국 당국 역시 중국내 ‘재스민 시위’ 확산을 우려하면서 철저하게 이들을 감시하고 또 단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활동중인 반체제 인사의 규모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어 그 수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톈안먼 사태의 주역인 왕단(王丹), ‘톈안먼 어머니회’를 조직한 중국 런민(人民)대 퇴직 교수 딩즈린(丁子霖) 등이 대표적 인물로 이들은 당국의 압박을 피해 해외에 체류하거나 국내에서 구금 혹은 가택연금된 상태로 지내고 있다.


국내파의 대표적 인물은 아무래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일 것이다. 류샤오보는 미 컬럼비아대에 방문학자로 머물던 중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자 귀국해 민주 개혁 요구에 동참하면서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 이전의 학력과 경력으로 볼 때 중국에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그는 중국의 참혹한 인권에 눈감지 않았던 것이다.


허우더젠(侯德建), 가오신(高新), 저우둬(周舵) 등과 함께 ‘톈안먼 4군자’로 불리기도 한 류샤오보는 이때부터 공안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고, 1995년 5월 베이징 교외에 1년여 감금됐다가 그 다음해 10월 ‘사회질서교란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서 3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12월 세계인권의 날에 ‘08헌장’을 발표해 공산당 일당체제 종식 등 중국 당국에 광범위한 민주개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2009년 12월 국가 전복선동죄를 적용받아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류샤오보의 이같은 민주화활동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류샤오보는 노벨상 시상식장에 참여할 수 없었고, 결국 노벨위원회 측은 대신 그가 불참한 의자에 메달을 걸어주는 이벤트를 만들기도 했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인해 노르웨이와 중국의 수년에 걸친 외교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9년부터 수감생활을 해 오던 류사오보는 2017년 5월말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서야 가석방돼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의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간암치료를 받던 중 2017년 7월 13일 숨졌다.


딩즈린을 비롯한 ‘톈안먼 어머니회’ 회원들도 대표적인 국내파 반체제 그룹이다. 톈안먼 사태 당시 자녀를 잃은 이들로 구성된 ‘톈안먼 어머니회’는 1995년부터 매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 공개서한을 보내 톈안먼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의 애국주의적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홍콩 연대(支聯會·지련회)’나 홍콩 비밀조직의 도움을 받아 해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은 활발하게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하고 있다.


지련회와 홍콩 비밀조직은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반체제 인사 135명을 해외로 망명시켰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으로 대만에서 정치 평론가로 활동중인 우얼카이시(吾爾開希)가 대표적인 해외 망명파 인사로 꼽힌다. 톈안먼 시위 당시 리펑(李鵬) 총리와 격론을 벌이던 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한 그는 텐안먼 사태 관련 수배자 리스트 2호에 올랐던 인물이다. 지난 1월에는 전세계 디자이너들이 포스터 작품을 통해 중국의 강제 장기 적출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으로 톈안먼 시위를 주도했던 왕단도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한 후 2009년 9월부터 대만 명문 국립정치대 대만역사연구소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톈안먼 사태 당시 탱크의 진입을 맨몸으로 막아 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왕웨이린(王維林)도 현재 대만에 머물며 대만 고궁박물관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반체제 운동을 벌이다 행방이 묘연한 실종자들도 아직도 많다. 가오즈성(高智晟) 변호사가 대표적 인물로 2017년부터 실종상태다. 가오즈성은 2006년 말 국가체제 전복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으나 2009년 2월 공안에게 연행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국제적으로 사망설이 나돌면서 문제가 되자 2017년 잠시 중국 산시(陝西)성 위린(楡林) 교외의 자택에 연금 상태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 후 다시 베이징으로 끌려가 연락이 두절됐다.


[톈안먼 시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국 정부 당국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톈안먼 사위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민중들이 톈안먼을 기억하며 민주화를 염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특히 6월 4일이 가까워질수록 중국 당국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당연히 톈안먼이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 하고 있고, 5월 중순이 넘어가면 톈안먼 일대는 엄중한 통제가 이뤄진다. 심지어 외신 기자의 출입마저 봉쇄하고 있으며 톈안먼을 관람하려는 중국인들마저 철저한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톈안먼 사태와 관련한 외신 보도들 자체를 완전 봉쇄하기 위해 중국에서 해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는 가상사설망(VPN)도 접속을 할 수 없도록 할 정도로 외부 정보 통제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의 SNS 곧 카카오톡 등이 먹통되는 것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微博)에서는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뜻하는 '6·4'의 검색도 완전히 막혀 있다.


중국내에서만 그렇게 톈안먼 관련 통제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홍콩과 마카오에서도 철저하게 봉쇄가 이뤄지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본토로 톈안먼이 유입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1990년부터 매년 6월 4일 저녁 대규모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던 홍콩도 지난해 6월 30일 시행된 홍콩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이 시행되면서 관련 행사 자체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다.


올해도 홍콩 당국은 코로나19를 이유로 올해 촛불집회를 불허했다.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支聯會·지련회)가 1990년부터 매년 주최한 빅토리아 파크 촛불집회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지난해부터 코로나를 핑계대면서 전면 금지시켰다.


특히 홍콩보안법 이후 당국은 톈안먼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홍콩당국이 집회 금지를 통고했으나 많은 시민이 집회 불허에 아랑곳없이 '개별적으로' 빅토리아 파크에 모여들어 촛불을 들면서 톈안문 추모 열기를 이어 왔었다. 지난해의 추모 집회 이후 경찰은 이후 해당 집회를 조직하고 참여한 혐의로 범민주 진영 인사 26명을 기소하기도 했다.


지난해와 달라진 상황에서 지련회는 결국 올해는 시민들에 빅토리아 파크로 가라고 독려하지 않을 것이며, 온라인 추모행사도 개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SCMP는 "촛불집회는 이미 과거의 일이 돼버렸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홍콩 당국의 톈안먼 추모집회 봉쇄는 결사적이다. 매년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던 빅토리아 파크에는 3000여명의 경찰들이 지키면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SCMP는 지난해에도 당국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집회를 금지했지만 약 2만여 명이 빅토리아 공원에 모인 바 있다고 전했다.


한편 톈안먼 사태를 기념해온 마지막 장소였던 홍콩의 6·4 박물관도 강제 폐쇄됐다. 지련회가 운영하는 이 6·4 박물관이 당국의 단속에 운영을 중단한 것이다.


홍콩 명보에 따르면, 지난 1일 오후 홍콩 레저문화사무처 관리들이 기념관을 방문해 "공공오락장소조례에 의거한 허가를 받지 않았다"며 "무면허 운영"이라고 경고하면서 폐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무면허 운영의 경우 2만5천 홍콩달러(약 357만원) 이하의 벌금과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기념관은 2014년부터 상설 운영돼왔는데 그동안 당국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갑자기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톈안먼 추모 집회는 마카오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홍콩프리프레스(HKFP)는 지난 5월 26일, ”마카오 경찰이 6·4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 추모 촛불집회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집회의 취지와 슬로건이 국가 전복을 선동하고 명예훼손 등 법 위반 소지가 있다면서 행사를 불허했다는 것이다.


사실 마카오는 그동안 홍콩만큼 적극적으로 톈안먼 추모집회를 가로막지 않았으나 올해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봉쇄하려 하고 있다고 관련 시민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 당국이 결사적으로 톈안먼 추모를 막지만 곳곳에 그 정신이 살아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중국 당국은 아직도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 사태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희생자 측의 주장에 "우리 선택이 옳았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일 "1980년 말 발생한 정치 풍파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미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며 "신중국 건국 70주년에 이룬 위대한 성취는 우리가 선택한 발전의 길이 완전히 옳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한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가 원래 이렇다. 그러나 톈안먼의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해진 1980년대 중국의 사회 상황이 배경이 되었던 톈안먼 시위, 지금 중국의 상황도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Why Times도 중국의 민주화를 꿈꾸는 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기리며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로 희생된 중국인들을 마음을 다해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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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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