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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5-22 08: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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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바쵸프 전 러시아 대통령


코로나19의 대유행이 1년반을 넘기면서 영국, 브라질, 인도변형마저 만연하여 장기화되고 있다. 백신효과는 파급이 크기 때문에 선진국 중심으로 관광과 무역 등 경제회복기능의 정상화가 기대를 모은다. 무엇보다 경제 1년 반이나 멈춘 것이나 다름없어 경기부양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최근 “21세기 고난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시대정신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KBS 강연을 들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주병기교수의 강연은 글로벌 경제전망과 처방으로, “소득 재분배 기능 개선으로 불평등의 원인인 경제구조를 혁신하여 ‘복지자본주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복지제도구축의 시급성을 강조한 열변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강연에 핵심이 빠져있었다. 복지국가건설은 정치에 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전문정당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20세기 불평등해결경쟁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KO패 당했다]


불평등 문제의 정치화는 1848년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내놓은 해에 프랑스에서 최초 사회주의혁명이 나면서 실험되었다. 당시 개혁당이 무산-노동계급의 불평등해법으로 최초로 실시한 경제조치가 국영공장이었다. 자본가들이 임금지불을 담당하고, 특히 무직자,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나누어주었고, 정부가 일급을 지불했다. 19세기 산업화에 따른 불평등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자유파 라마르틴(시인)의 국민당과 루이 블랑의 개혁당이 좌우연합정부를 세계최초로 구성해 불평등문제해결을 시도했다.


당시 마르크스는 독일쾰른의 잡지특파원으로 파리에서 활약했다. 그는 프랑스민중의 왕정복고타도-민주정부수립을 보도했다. 이 혁명은 6개월 후 부르주아반동으로 붕괴되어 무산되었고 나폴레옹 3세의 제3제정으로 진전되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독일혁명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영국에 망명해 ‘프랑스의 계급투쟁’이라는 “프랑스혁명사 3부”와 “자본론’을 집필했었다.


인간사회의 불평등문제는 마르크스의 평생주제가 되지만, 그 후에 사회의 양극화현상이 표출되었고 “공산당 선언”의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이 세계에 퍼졌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사적 소유권폐지 등 공산주의의 정치이론을 전파했다.


9세기 말, 불평등문제의 해결방식를 위한 혁명파 공산당과 민주파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 공산혁명은 모스크바 세계 공산주의의 총본산을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는 19세기말 독일 사회민주당과 프랑스의 사회당, 영국노동당의 정치세력화로 성장했다.


그런데 레닌의 세계공산주의는 구미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으나, 2차대전 후 동서냉전으로 이어졌다. 냉전은 1950년6월25일 스탈린의 지령으로 김일성이 선전포고 없는 님침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냉전이 유발되었고, 1992년 모스크바의 세계공산주의 총본산을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해산함으로서 74년 만에 종식되었다. 한반도북에는 김씨 공산 세습왕조가 공산국으로 남아있다.


[에버트재단 토론회, 사민주의없는 딜레마 한국의 정치무능으로 연속 창당실패]


독일의 애버트재단이 남한에 사회민주주의정당의 부재를 이슈화한 바 있다. 사민주의연구회에 토론회를 요청했던 것이다.


2011년5월15일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없는 이유”란 제목의 애버트재단 주최 토론회는 2013년 서울의 대화아카데미회관에서 열렸다. 이홍구, 한명숙 전 총리와 남재희 원로언론인(4선 국회의원)등 2백여명의 정치인-지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숭실대 독일철학 원로교수 이삼열박사 사회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정당 건설은 가능한가” 라는 의제였다. 한국의 정치현실은 “거의 모든 정당들이 사회복지를 합창하지만 제도화는 무망(無望)”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발표자로서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의 정치구도에는 사회복지와 시민행복을 보장하는 사회민주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복지국가건설은 무망하다. 한국에 복지제도를 마련해 실시하기 위해서는 사회민주당의 건설이 시급하다. 오늘 사회복지를 진보와 보수정당이 합창하고 있으나, 실현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의 부재, 이것이 한국정치의 딜레마요 비극이다”


1959년 서독 사회민주당의 바트 고데스베르크선언의 역사적의미를 소개하면서, 독일의 사회복지는 1947년 에르하르트총리가 주도한 기독교민주당이 알렌강령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2차 세계대전 후의 복구와 불평등 해소정책으로 제창한 후, 사회민주당이 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


사회민주당은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 혁명론-공산주의 새 사회론을 강령에 명시한 유물론과 계급투쟁, 자본주의멸망테제를 모두 삭제하고 시장경제-의회민주주의, 공산당과 적대정책, 사적소유권의 국가 보호의무 등을 명시한 수정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전향은 서구정치를 진동시켰고, 서독의 복지국가정책이 여기서 가속했던 것이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정당 건설이 불가능인가”의 물음에 대해 결론으로 나는 이렇게 밝혔다.


“...가능하다는 것이 발표자의 판단이다. 한국정치가 온건보수와 중도좌파 양대주류로 혁신되지 않으면 선진국도약과 남북분단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의 복지여망으로 좌우가 모두 사회복지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사회민주당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없으니 정치의 심각한 딜레마이다. 이것은 꼭 물어야 될 질문이며 앞으로 한국정치의 힘으로 풀어야 한다....제일 빠른 길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전향하는 것이다, 동구의 모든 공산당과 서구공산당이 모두 사회민주당으로 전향해 잘도 생존하는데, 한국정치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발표와 토론이 끝난 후, 한명숙 전총리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한국에도 사민당이 등장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질문했다. “발표자가 앞에서 독일 사민당당수 빌리 브란트의 바트 고데스베르크선언에 구체적으로 답이 나와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민중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발전적 재창당을 하는데 답이 있다”고 말했다. 곧 이어 주독일대사로 부임할 정범구대사도 “주섭일 선배의 발표가 모두 정답입니다”고 평가해 주었다.


남재희 원로언론인은 ‘프레시안’에 토론회 논평을 내주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사고의 틀이지 정책내용이 기성품처럼 미리 담겨지는 물건이 아니다’고 말하고 “현대판 삼민주의, 삼균주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지적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 이렇게 논평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외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특히 계획화-정보화시대라는 현실에 밀착해서 각고의 정책노력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진보신당, “정의당이냐 사회민주당이냐” 당명선거서 또 ‘정의당’에 패배하다]


그 후 사회민주주의연대 주대환대표가 2014년9월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150여명의 당원과 지지자들이 모여 한국이 복지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정책 실현을 위해 한국사회민주당 창당을 선포했다. 필자는 맨토자격으로 축사를 했는데, 당원들이 거의 모두 20-30대의 젊은세개가 주류여서 큰 희망을 품었다. 당원가운데는 진보신당 당원들도 있었다. 주대표는 진보신당안에 사민주의클럽의 회원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다는 귀띔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주대표와 진보신당과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를 강조하면서, 당내 사민주의클럽의 성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 확장을 위해 총력전을 펴는 것은 복지국가건설을 위한 필연적 단계라고 설명했다.


2016년 진보신당이 당명변경을 위한 당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주대표가 전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사실 진보신당에는 NL계보다 PD계가 다수임으로 사회민주주의와 협력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당명개정안에 당내 사회민주주의클럽이 ‘한국사회민주당’을 제안하기로 했다는 주대표의 설명이 있었다. 서울문리대 후배이며 사회민주주의에 매우 호의적인 이부영 전민주당당의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의장은 열성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박영호 전한신대 대학원장과 평생 사회민주주의운동을 역임했던 김철선생의 아드님으로 사민주의저술가인 김유교수도 참가했다. 진보신당대회는 새당명을 두고 ‘정의당’과 ‘사회민주당’이 격돌했다.


기아자동차 노조에서 서구사회민주주의의 동향을 문의해 “어떻게 그람시가 창당한 이탈리아공산당이 소멸한 경위를 1992년5월 당해체를 위한 전당대회 취재 경험을 소개해 주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냉전시대 자유진영 최대의 공산당으로 유명했다.


나는 1976년 이탈리아공산당이 집권한다는 보도를 보고 서유럽정계가 극도의 긴장을 한 분위기에서 선거취재를 했었다. 로마의 프레스센터에 도착 후 개표상황을 취재했다. 기대와는 달리 결과는 우파 기독교민주당이 간발의 차로 승리했다. 당시 베르링거 공산당수는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 유권자의 공산당거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그럼에도 유권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유권자의 공산주의거부가 견고함을 체득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공산당은 1992년3월 오케토당수가 소집한 전당대회에서 당해산을 선포하면서 ‘좌파민주당’으로 전향한다고 선언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붕괴-냉전종식-독일통일-소련공산당해체 후, 공산당해체와 아울러 사회민주주의정당으로 전향이 유행했다. 그후 좌파민주당은 1996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했는데, 냉전시대 40년 야당인 공산당이 전향한 불과 수년 후 집권에 성공했다. 좌파민주당은 수차 당명을 갈다가 오늘은 ‘민주당’이 되어 좌파냄새를 완전 제거한 중도정당이 되었다. 유럽정치의 공산당거부섬멸은 한국정치에 모범이 될 것을 기대했다.


이부영의장, 박원장등 지원팀은 사회민주당의 승리를 소망하면서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간발의 차로 ‘정의당’의 신승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민중민주주의(PD)’를 표방한 ‘정의당’의 승리는 결국 서구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4반세기전 해산한 소련공산당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한국정치의 “선사시대(先史時代)”화를 보는 것 같아 실망했다. 냉전종식 후, 서구 사회민주당들과 우파정당들은 소련의 스탈린시대등 공산당시대를 ‘선사시대’라고 조크했던 것이다.


진보신당은 주로 PD계열의 당원이 다수로 알려져 있어 NL보다 사회민주주의정당과 근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다. 그후 진보신당의 정의당 개명은 계속 군소정당의 틀을 깨지 못하게 만들었다. 본질은 PD, 마르크스-레닌주의로는 유권자의 신뢰를 확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민주당을 선택했다면 오늘의 정의당보다 더 만은 한국사회민주당으로 크게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소련과 구동구위성국가들이 공산당을 해산해 사회민주당으로 전향 후 거의 모두 집권당으로 약진했던 것이다. 동독의 구공산당이 사회민주당 전향 후 유권자들의 우호적 태도가 집권당으로 도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의당은 위장당명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군소정당으로 남을 것이다. 희망없는 레닌-스탈린의 이념적 좀비가 되지 말고 독일 빌리 브란트, 프랑스 미테랑의 복지업적을 계승한 제자가 되어야 복지국가건설주역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1992년 소련공산당과 동구공산당이 해체와 동시 사회민주당으로 전향한 동구국가들이 어렵지 않게 유럽연합(EU)에 흡수통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공산당과 같이 스페인공산당도 해산했다.


유럽정치는 동서분단시대를 종식하고 모든 동구공산위성국가들이 의회민주주의. 시장경제, 언론 종교 학문 여행 주거이전 등 모든 자유를 만끽하는 민주국가로 전향함으로서 유럽의 평화와 번영의 정치주역으로 새출발하게 되었다. 냉전시대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 코메콘(COMECON)과 군사기구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동시 해체됨으로서 동구의 신생민주국들이 서방진영의 나토(북대서양동맹)과 EU에 쉽게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정치혁신재단 보고서, “공산주의는 나치즘 이상의 야만적 전체주의였다!”]


소련의 세계공산주의 멸망문제를 종합연구한 ‘베를린장벽붕괴후 공산주의멸망과 정치변화’의 학술보고서를 총지휘한 스테판 쿠르투아 프랑스사회과학원 연구위원장은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시대의 정치변화를 향하여”라는 보고서 권두논문에서 스탈린의 소련공산주의가 왜 나치보다 더 잔인한 전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규명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공산주의가 나치즘과 파시즘이상의 야만적 전체주의화한 내막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전체주의의 지배도구로 완전히 전락한 결과, 공산당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등 인류최악의 범죄세력임을 밝혀내고 비공산주의 좌파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실태를 밝혀냈다”


스테판교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볼세비키주의는 20세기 세계공산주의의 일반적 정치형태가 되었고 이것이 바로 세계공산주의 시스템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세계공산주의는 모스크바에 제1 지도부인 소련공산당, 제2, 제3의 하부 시스템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제1그룹은 레닌이 모든 직업혁명가들과 공산당들을 재규합한 최초의 볼세비키당이 세계공산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레닌은 세계의 모든 공산지도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1920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출범시켰다. 특히 모스크바의 본부는 민주적 집중주의, 지도자의 지명, 혁명수단의 지원등 모든 전략전술을 모스크바가 통제-지휘했다. 인터내셔널가입 21개 조건을 수락한 세계의 공산당들은 자본주의를 불법지하투쟁방식의 폭력과 시민전쟁, 모략과 폭동으로 파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제2 하부시스템은 1944-45년 중동부유럽과 중국, 북한, 베트남 등 아시아국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공산당=국가시스템이 확립되었다. 1970년대 동남아와 중남미 아프리카로 공산당-국가시스템이 확대되었다. 공산주의 시스템은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의 구조적 네트워크가 되어 “세계공산주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제3 하부시스템은 공산주의국가공동체와 연대-연합하는 정치세력이다.


1917년부터 평화의 이중성과 노동운동보호 명분으로 연합동맹관계를 형성했다. 1922년부터 반식민투쟁과 민족해방투쟁까지 연대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서 유럽의 세계공산주의 체제는 70여년간 반민주적 전체주이적 정치형태로 강력한 조직망을 확보했다. 소련의 세계공산주의체제는 전체주의의 본질을 표출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설명을 이어간다.


“이 전체주의는 스탈린에 의해 보다 확실하게 시스템화 되어 모든 공산주의국가들, 특히 중국 북한 캄보디아에서 중첩되어 표출되었다. 1980년부터 소련과 유럽의 ‘인민민주주의체제’는 스탈린체제보다 완화되었으나, 본질은 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몰렸으며 헝가리자유봉기, ‘프라하의 봄’ 폴란드 연대노조의 봉기와 전쟁상태선언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앙골라, 에티오피아, 니카라과를 석권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고르비, 동독창설 40년축사 “개혁에 늑장부리는 지도자는 하늘의 벌받는다” 폭탄선언]


1989년11월 베를린장벽붕괴는 소련의 반파시스트운동과 국제평화운동이라는 대서방선전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미화하는 허위날조였다. 특히 소련의 국제평화운동이라는 대서뱡 위장선전은 스탈린을 미화하는 허위날조임이 들어났고, 공산진영의 정치경제적 몰락이 이념적 한계를 드러냄으로서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1985년 멸망도상의 공산진영을 떠맡은 고르바초프공산당서기장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를 탈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의 탈출카드를 만들어 국제사회 안팎으로 설득행각을 했다.


그는 안으로 의회민주주의(대통령선거와 의회선거등)를 실험하면서 밖으로 미국과 군축-핵협상에 나섰고, 동구위성국에게 ‘나라의 운명은 국민이 결정한다’는 자주노선을 권했고 공산체제탈출기회를 암시하는 폭탄선언을 동독창설 40주년 기념식에서 터뜨렸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결사반대하는 호네커 동독공산당당수에게 “개혁에 늑장부리는 지도자는 하늘의 벌을 받는다”고 고르바초프가 경고했단 것이다. 호네커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결사반대하는 골수 공산당원으로 고르바초프의 적수였다.


10월7일 건국40주년 동독의 군사퍼레이드가 시작되면서 구경군들이 돌연 ‘자유’를 외치는 가두시위로 돌변했고, 군사퍼레이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고르비는 “우리는 어떤 일이 터져도 동독주둔 붉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브레즈네프 독트린거부 선언이었다.


브레즈네프는 1963년 ‘프라하의 봄’ 시위가 터지자 바르샤바의 소련군탱크부대를 동원해 유혈진압을 했었다. 브레즈네프독트린은 동구의 반공시위를 붉은 군대로 진압하는 탄압정책을 이르는 군사용어였다. 고르바초프의 브레즈네프독트린 폐지선언은 동독을 비롯한 동구시민의 자유투쟁을 묵인하는 신호가 된 셈이다.


동독독립 40주년기념식은 행진과 시위의 혼란으로 끝났지만, 이 때 부각된 자유시민단체 ‘노이에스 포럼’은 그후 연속적으로 동독의 자유시위를 주도했다. 고르비가 귀국한 직후, 동독공산당 비밀경찰 슈타지 총수 크렌츠가 당중앙위원회를 소집, 호네커를 부패혐의로 추방하고 스스로 당수가 되어 동독의 개방정책을 주도했다. 그가 시민봉기를 묵인함으로서 베를린장벽붕괴가 시작했다. 그리고 서독 콜총리의 카운터파트가 되어 베를린장벽붕괴 후 통일논의에 대한 동독대표로 등장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동서독일통일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동독을 공산족쇄에서 풀어주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폐지라는 선물을 안겨줌으로서 동독은 재빨리 자유민주주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동독공산당은 사회민주당과 통합으로 사회통일당(SED이 되어 되었다. 그리고 독일전역에서 계속된 “여행의 자유, 서독방문의 자유”를 위한 시민의 행진이 베를린장벽붕괴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동독시민은 통일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329일만에 통일을 완료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냉전시대 또 하나의 분단국가 한국에게는 환상일 뿐이었다. 그후 31년 오늘의 한반도는 북의 김정은의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으나, 남의 한국은 세계사의 문명에 역주행하는 위기의 혼란속에서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계속)


***주섭일: 언론인, 통일준비위 언론자문위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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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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