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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4-11 21:14:05
  • 수정 2022-10-09 16: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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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해질녘 한 시간


사진작가 K가 블루아워(The blue hour)란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프랑스어 표현에서 유래 했다는데 해뜰녘과 해질녘의 박명(薄明)이 지는 시간대라 했다. 이 시간대의 하늘은 완전히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으면서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것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했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도 하는데 동양에선 귀신도 활동을 않는 때라 하여 비밀하고 특별한 일을 도모할 때는 이 시간대에 했다 해서 순결의 시간이라고도 한단다.


하루 중 가장 하늘의 변화가 무쌍하다는 이 시간대를 또 다른 표현으로 매직아워 혹은 골든아워라고도 하는데 매직아워란 해가 뜨고 지는 전후 30분씩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해질녘 황금빛으로 물드는 20~30분의 시간을 골든아워라 부른단다. 하루 중에서 빛이 가장 아름다운 때여서 사진작가들이 아주 좋아하는 시간대다. 해질녘 한 시간, 인생으로 말하면 언제쯤일까.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니 인생의 해질녘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상황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해질녘의 노을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서글퍼진다. 그런 마음은 어린 날부터 있었던 것 같다. 노을을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외할머니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은 내게 어머니셨다. 어머니라는 얘기는 내 어린 날에 정을 받을 수 있던 전부였다는 말이다. 그런 할머니가 혹시라도 나만 두고 세상을 떠나버리실까 봐 늘 전전긍긍 불안해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아 매라도 드실라치면 나는 잽싸게 도망을 쳤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방문을 걸어 잠그며 죽어버리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 죽는다는 한마디에 몸이 굳어버려 할머니께 제발 그러지 말라며 나아갔고 그런 나를 붙잡아 할머니는 예외 없이 매로 다스리곤 했다.


내 마음 안엔 산 너머로 넘어가는 저녁 해처럼 할머니가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늘 있었다. 그런 불안함은 할머니가 가신지 오래인 지금에도 남아있다. 그것은 내 것인 줄 알던 것이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이 움킨 물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안타까움이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밀레의 만종을 보면 알지 못할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중학생 때 미술선생님으로부터 평화와 감사라는 해설을 들으면서도 난 까닭 모를 슬픔을 느꼈다.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농부 부부, 캔 감자가 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로 교회당이 보인다. 밭에서 일을 하던 부부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당의 종소리에 잠시 서서 저녁 기도를 올리는 장면의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晩鍾)'은 프랑스의 자랑이다. 그런데 어린 내 눈에 그게 평화로워 보이기보단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랑을 줄 사람을 갖지 못한 어린 마음 깊이 담겨있던 슬픔과 안타까움이 그림을 쓸쓸함으로 공감케 했던 것일까.


만종이 그려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한 화가였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畵商)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림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1천프랑을 지원하여 탄생된 그림이 바로 '만종'이란다. 그런데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신성한 노동 후의 고요한 정적과 평화보다 정체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집요하게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불안감의 실체를 알아내려 밀레에 관한 책까지 썼다. 한데 수십 년이 지난 후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지금 보이는 표면의 물감 색채 밑에 숨어있는 초벌 그림을 찾아냈는데 어린아이의 관이었다. 달리의 직관이 맞았던 것이다.


해질녘 농부 부부가 씨감자가 아닌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씨감자를 심으며 봄을 기다렸지만 아기는 굶주림을 못 이긴 채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죽은 아기를 땅에 묻으려는데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와 부부는 아기를 위한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본 밀레의 친구가 죽은 아기를 그림에 넣지 말라고 했고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위에 감자를 덧그려 출품을 했단다. 그렇게 슬픈 사실이 묻힌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졌던 것이다.


해가 지는 저녁, 사랑하는 자식을 차가운 땅속에 묻어야 하는 부모의 가슴과 마음이 어떠했을까. 막 해가 넘어가 버린 골든아워, 그런 슬픈 사연만 없다면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아름답기만 할 그림 속 풍경이 아닌가. 그러나 바구니 속 어린 시체는 가장 사실적으로 그 시대를 표현한 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런 진실이 가려져 있다가 세월이 가면서 밝혀진 것처럼 우리 삶 속 가려진 진실 또한 언젠가는 밝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고 보면 겉으로 보이는 평화 속에 숨겨지고 가려진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더 많은 게 우리 삶이 아닐까.


해질녘,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해질녘 밝음이나 아름다움이 없는 걸 보면 아직은 아닌 것도 같지만 그런 순간의 밝음이나 아름다움을 항상 볼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 삶도 모두 보여주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렇기에 내 아이들이 어린 날의 나처럼 불안해하지 않고 사는 것만도 우선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해질녘 그 한 순간의 아름다움보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작은 밝음, 작은 아름다움이라도 보이는데 마음을 써야 할 것 같다. 동백꽃이 세 번 핀다고 했던가. 사람의 삶에서도 세 번쯤 자기를 아름답게 나타낼 기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 번 중 하나도 붙잡지 못하는 것도 사람이란다. 나도 한 번이라도 나답게 피었으면 싶다.


그렇기에 해질녘 얼마동안의 골든아워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해질녘 한 시간은 자연에게나 사람에게나 마지막으로 베풀어지는 신의 사랑으로 가장 큰 축복의 시간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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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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