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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2-21 17:36:33
  • 수정 2022-10-09 15: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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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 자동차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물결무늬의 결이 등을 타고 내려와 있다. 그 짧은 길이에서도 한 번 휘어지며 다시 내려온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이게 내 집에 있게 된 것만도 35년이다. 아들아이가 네 살 때였던가. 유난히 차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자동차회사 부사장으로 있던 아이의 큰아빠가 독일 출장길에서 사다 준 것이다. 아이는 그걸 손에 들고 놀고 입으로 빨기도 하며 아주 잘 갖고 놀았다. 그런데 조금 크면서부터 다른 것으로 눈이 가더니 찾는 횟수가 줄어들고,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버리자 내 소유가 되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다시 돌아온 지금엔 가끔씩 그 아들의 아이들이 갖고 놀긴 하지만 여자애들여서인지 제 아빠 같진 않다.


35년이란 세월의 때가 묻었을 목각자동차를 오늘은 비누칠을 해서 깨끗하게 씻어보았다. 그런데 물에 불리니 뭔가 벗겨진다. 윤이 나라고 겉에 칠을 했었나보다. 오랜 세월 후라 그 칠도 힘이 약해졌는지 물에 불리니 금방 벗겨져 내린다. 한데 칠이 벗겨지니 나무 본래의 결이 나타난다. 곱다. 나무의 어느 부위로 만들어진 것일까. 물결처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 결 무늬, 차의 형태를 따라 무늬도 길게 흘러가고 있다. 바퀴의 결은 가로로 질서정연하게 그린 듯 나있고 몸통은 시냇물 흘러가듯 물결 져 있다. 결을 따라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손으로도 흐름이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엔 다 결이 있지 않을까. 할머니의 손에서 느껴지던 삶의 결, 손주 녀석의 손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도 그렇고 매일 입는 옷이며 양말에도 다 나름의 결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날의 추억이며 지난 삶의 기억들도 결이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목각자동차를 씻은 것은 큰 잘못일 수도 있겠다. 삼십오 년 추억도 결을 이루었을 텐데 깨끗하게 한답시고 그걸 벗겨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편 생각하면 본연의 나뭇결을 찾아준 셈이기도 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아내의 손을 잡아주다가 깜짝 놀랐다. 내 손도 많이 거칠어졌지만 여자인 아내의 손바닥이 나보다 훨씬 거칠다. 그만큼 나보다 험하고 힘들게 살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미안하고 안쓰럽다. 전엔 그런 생각조차 안 했었는데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내 마음의 세월 물결일까 싶기도 하다.


목각 자동차의 등을 쓰다듬으니 물결무늬 같은 목리가 손끝에 닿는다. 삼십오 년을 숨어있다 나타난 결이다. 그래선지 보기는 반지르르해 보여도 손끝에 와 닿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결이란 살았음과 살아있음의 표가 아닌가. 숨결, 살결, 마음결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의 결이나 돌의 결도 그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 아닌가.


젊은 시절 석공예가인 교회 집사님을 따라 그의 작업장엘 가 본 적이 있다. 집채만 한 큰 바위를 요리조리 만지며 살피더니 작은 정으로 몇 군데 톡톡 홈을 내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부르더니 여럿이 한꺼번에 그 홈마다 정을 대고 신호에 맞춰 동시에 망치를 내리치니 그 어마어마한 바위가 힘없이 좍 갈라져버렸다. 결을 정확히 찾아 어떤 모양으로 쓸 것인지를 계산하고 결 따라 충격을 주면 그렇게 갈라진다고 했다. 결은 바위를 지탱하는 힘이었지만 사람의 급소처럼 치명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해서 결은 생명이다.


요즘 들어 깜박깜박 잊기를 잘 한다. 금방 말을 해놓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어제 들은 얘기는 까마득하게 잊힌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더 짙게 남아있는 기억도 있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습은 갈수록 형체를 분명히 한다. 이 또한 세월의 결일 텐데 더 짙어지고 분명해 진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고 보면 웬만한 모든 것이 흐려지고 옅어져 가지만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될 첫 기억들은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지지도 희미해지지도 않는가 보다. 살아가는 시간의 나이테 또한 결일 텐데 말이다.


아내에게 목각 자동차를 주어봤다. 아내는 아이의 그 무렵 삶을 지금인 것처럼 얘기한다. 아빠와 엄마의 차이인 것 같다. 하지만 목각자동차를 쥔 아내의 손에 자꾸 눈이 간다. 아침에 느꼈던 세월의 결이 마음 속 주름으로도 다가와서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아내를 쳐다보니 그 눈가에도 짙은 주름이 앉아있다. 그와 내가 함께 해서 만들어진 결이다. 나를 보는 아내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목각자동차를 책장 맨 위에 올려놓느라 깨끼발을 하며 용을 쓰다 보니 헉 숨이 차다. 이도 삶의 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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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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