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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15 05:02:35
  • 수정 2022-10-09 15: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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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서재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남산 N타워가 보인다. 새벽이면 눈 부시게 해가 떠오르는 동쪽 방향에 남산이 있다. 남산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지만 늘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산이다. 남산 봉우리에 있는 뾰죽한 송신탑은 언제라도 오라고 손짓을 한다.


마침 오전 일과를 마치고 만난 친구가 남산에 가을 단풍 보러 가자고 하기에 살살 걷기 좋은 산길에 들었다. 어릴 때 뛰어놀기도 했지만 벚꽃 필 때와 단풍 들 때면 가는 곳이라 익숙하고 반가운 곳이다. 남산에 올라 갈 때는 주로 장충동 국립극장을 지나가거나 충무로 쪽에서 올라가고, 내려 올 때는 회현동이나 후암동 길로 방향을 잡는다. 인적 없는 산길도 좋지만 오래된 동네의 골목이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북쪽 능선을 내려다보고 남산 도서관 쪽으로 내려왔다.


케이블카 안에서 서울의 북쪽을 바라보면 남산과 마주 보며 짝을 이루는 북한산이 보이고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청와대 옆 동네 궁정동을 가늠할 수 있고, 고개를 서쪽으로 돌리면 중고등학교 6년을 다녔던 모교를 찾을 수 있다. 태어난 도시에서 살면서 때때로 와볼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천양희 시인은 그의 시 '참 좋은 말'에서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라고 했다 남산 정상에 올라가서 한남동 방향을 내려다보면 갈래머리 나풀대며 친구들과 뛰어놀던 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세 동생과 함께 물놀이하던 집 앞 개울이 보이고 젊은 어머니의 도 보인다. 길을 걷다보면 그리운 것들이 예기치 않은 길목에서 툭툭 튀어나올 것 같다.


학교를 오가던 언덕길과 작은 집이 내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엔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기껏해야 학교에서 단체로 뇌염 예방주사를 맞거나 구충제를 먹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1.5M2M로 제한 한 적은 없다. 모처럼 엄중한 코로나 방역 2단계에서 1단계로 내려왔지만 남산 공원 팔각정 옆에는 사람 간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가까운 사람들을 멀리하라니 참 어이없는 노릇이다.


COVID-19 기간 중에 집에 머물며 일을 보고 필요해도 급하지 않은 일을 피하는 동안 새로운 사람은 전혀 만나지 못하고 친하던 사람들은 잘 있겠지 하면서 거의 1년을 보냈다. 방역지침이 2단계에서 1단계로 바뀌자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잘 있겠지, 곧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생각에 그치고 정말 못 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12년 간 한 도시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문우들에게도 연락이 왔다.


못 만나는 동안 손자손녀를 보고, 아프다 회복했지만 약을 한두 가지씩 챙겨 먹고, 은퇴했거나 여전히 생업이 바쁜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두터운 공감대가 있어서 옛이야기기 하며 많이 웃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대신에 오랜만에 호수공원을 걸어보자는 의견에 한결같이 찬성을 했다. 그곳에 살았던 12, 떠난 지 15년이 지나는 동안 굵게 자라 숲을 이룬 나무들이 눈부신 햇살 아래 빛나고, 주민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의 가을소풍을 나온 듯이 즐거워 보였다.


시어대로 옛날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호수공원에서 해마다 시민백일장을 열고, 시수필낭송회와 시화전을 하던 푸르른 추억이 다가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날들의 추억들이 금싸라기 같이 귀하게 느껴졌다. 못 만나는 동안 원로 몇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인들과의 일화를 떠올라 웃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면서 추모의 정을 나누었다.


시공간을 공유했던 벗들과 만나 누리는 행복감으로 자가 격리된 생활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었기에 인생 뭐 있나’, ‘좋은 추억은 삶의 보약이다라며 일도 해야 하지만 활동력 있을 때 계절마다 만나 세월의 흐름에 같이 몸을 싣고 격려하며 살자고 했다.


삶터를 내주고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는 북한산, 남산, 정발산과 흐르면서 순환하는 한강, 청계천, 호수공원과 더불어 평생을 살았다. 사람은 산과 물에 기대게 되어 있는지 작은 농가주택 터를 잡은 가평은 명지산과 연인산과 함께 백둔리 계곡이 있고, 가족들과 종종 바람을 쐬러 가는 강화에는 마니산과 바다가 있다.


지금은 한강이 멀지 않은 동네에 작은 동산을 끼고 산다. 이 집의 추억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되는 날이 있을 테지만, 비빌 언덕이 되어준 사람들이 내 등 뒤에서 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으며 다가오는 옛날에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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