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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 파문당한 좌파대부 사르트르, 한국에 주는 교훈 - 대역죄인으로 몰린 좌파 대부 사르트르, 왜? - 사르트르 창간한 좌파신문 ‘리베라시옹', '대국민사과' - 아롱 사상 이어받은 마크롱, 프랑스 대개혁 뿌리
  • 기사등록 2020-10-26 12:48:12
  • 수정 2020-10-26 17: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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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들로 부터 집중적 공격을 받았던 레이몽 아롱 [일러스트=CBS News 캡쳐]


[프랑스에서 파문당한 사르트르와 시진핑의 6.25 발언]


최근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이었고 국제문제 대기자였으며 우리 신문의 주섭일 논설고문이 ’프랑스에서 파문당한 좌파 대부 사르트르, 왜?‘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왔다. 이 칼럼은 지금 유럽의 좌파와 우파 대결이 어떤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또 그러한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는 어떠한 교훈을 던져 주는지 명확하게 보여줘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관련기사: [주섭일 칼럼] 프랑스에서 파문당한 좌파 대부 사르트르, 왜?(10월 17일)


특히 이 칼럼은 최근 중국 공산당 시진핑 주석이 6.25를 가리켜 “평화 수호위해 압록강을 건넜다”면서 “항미원조 전쟁에서의 승리는 중화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며 인류 평화, 발전, 진보의 역사에도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과 맞물려 다시한번 사르트르의 파문이 관심을 모은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좌파의 대부는 왜 파문을 당했으며 사르트르와 6.25, 그리고 시진핑의 발언과는 어떤 연계가 있는 것일까?


[’위대한 사상가‘로 칭송받던 사르트르가 파문당한 이유]


우선 사르트르를 말하려면 반대편에 서서 치열한 논쟁을 했던 레이몽 아롱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한다.



20세기 프랑스 지성계(知性界)를 언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인물이 바로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며 수십 년간 치열한 이념 대결을 벌였던 레이몽 아롱(1905~1983)과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다.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최고 명문인 고등사범학교(ENS) 동기생이자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동지였을 정도로 절친 사이였다.


이후 사르트르는 ‘구토’ ‘자유에의 길’ ‘변증법적 이성비판’등의 실존주의 사상의 창설자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으나 거절하기까지 했다. 반면 아롱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철학과 사회학, 언론계의 거두로 솔본느대와 ‘에콜 드 프랑스’ 교수로 우파지 ‘르 휘가로’의 주필로 활약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파 대부 사르트르는 프랑스 사회에서 파문을 당했고 반면 적수였던 우파 대부 레이몽 아롱은 21세기 국민 사부(師父)로 추대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의 6.25가 갈라 놓은 사르트르와 아롱


사르트르와 아롱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한 사건이 1950년의 6.25, 곧 한국전쟁이었다.


사르트르는 “남한 괴뢰도당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을 여과 없이 대변했다.


반면 아롱은 종군기자로 한국전에 뛰어들면서 ’르 휘가로‘의 칼럼을 통해 “6.25는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南侵)‘이라면서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북한을 규탄했다.


사르트르는 북한에 의한 남침이 사실로 확인되자 이젠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한때 “6·25 전쟁은 한반도 통일전쟁”이라는 프랑스 극좌파 주장에 동조하기까지 했다.


당시 좌파가 주도하던 프랑스 지성계는 남침을 주장하던 아롱을 “미 제국주의자의 주구(走狗)”라며 매도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롱은 더욱 더 자신의 분명한 소신을 밝혔지만 상당수 우파 지식인들은 좌파의 ‘낙인찍기’가 이어지자 아예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아롱과 함께 옳은 것보다는 사르트르와 함께 실수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팽배할 정도로 좌파사상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렇게 사르트르와 아롱은 6.25를 계기로 ‘공산당의 동반자’ 대 ‘자유민주의 대변자’로 갈라서면서 치열한 논전을 펼치게 된다.


*대반전을 일으킨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


이런 좌파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그 시기에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아롱이 낸 책이 바로 ‘지식인의 아편’이다. 1955년 출간한 뒤 1962년 개정 증보판을 냈다. 바로 이 책으로 인해 좌파와 우파간 논쟁은 더욱 격렬해지면서 사르트르와 아롱은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원수 사이로 변해갔다.


다름아니라 사르트르가 내세우는 공산주의가 바로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아롱의 이 말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종교를 지식인의 아편’이라 규정한데 대해 “공산주의야말로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받아친 것이다.


아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참으로 대단히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유럽의 진보 지식인들의 다수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편을 들면서 아롱은 사상계에서 고립되고 소외되었다. 사르트르는 심지어 ”공산당 반대자는 모두 개다“라고 폭언을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공산주의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압도적 분위기 속에서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을 통해 반인권적인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파가 ‘진보’의 이름을 독점하고 민중에게 거짓 선전·선동을 일삼는 현실을 이렇게 개탄했다.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와 같다. 절대성을 강조하고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은 민중을 고난으로 이끌 뿐이다. 거대한 수용소 국가로 전락한 소련의 모습은 이를 대변한다. 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의 중독자다. 객관성,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은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아롱은 사회의 분열에 대해서도 이렇게 일갈했다.


“...분열의 원인은 하나다. 소련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친구나 동지, 형제간에도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부정하지 않았다. 카뮈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프랑코의 악을 공격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최후의 단계에서 카뮈는 서방진영을 선택하고, 사르트르는 공산진영을 선택한 사실에 있다”


여기서 ‘이방인’ ‘페스트‘ ’반항적 인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알베르 카뮈가 등장하는데 아롱이 카뮈의 이름을 댄 것은 그가 스페인의 프랑코, 나치히틀러 등과 같이 소련공산당 두목 스탈린도 전체주의자로 규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뮈가 요절하자 바통을 받은 것이 아롱이었다.


아롱은 소련의 몰락도 예견했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거대한 소련을 침몰시킬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다. 미래와 과거의 투쟁은 더더욱 아니다.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와 이념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아롱은 또한 소련 체제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호하는 좌파의 소위 ‘진보적 폭력론’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반혁명 세력에 대한 폭력을 용인해도 좋다는 진보적 폭력론은 도그마(dogma)에 빠진 좌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반문명적인 행위를 허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지성인 자격이 있는가. 소련이 자유를 갈망하는 헝가리 국민을 탱크로 짓밟은 것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이 그들에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와 인권에 눈 감게 만들었는가. 이념의 우상, 독선의 도그마에 빠진 탓이다.”


아롱은 더불어 좌파들이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착취 도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욕망에 따라 배분받는다’는 선전은 허공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인간의 열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허구에 몰입할수록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가난한 세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좌파들은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혀선 안 된다.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의견을 용인하지 못하는 폐쇄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선동적인 ‘진보팔이’로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것은 문명의 퇴보를 재촉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진보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공산주의의 해체, “아롱이 옳았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드디어 무너지고 1990년 10월 독일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1991년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세계공산주의 해체선언이 이어지면서 공산진영은 드디어 소멸됐다. 자유민주주의가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1980년, 아롱은 1983년에 작고해 공산주의 멸망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죽기 직전 극적인 화해를 한다. 1979년 베트남의 ‘보트피플’ 구출사건 때,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의 난민구조운동에 함께 동참했기 때문이다. 당시 ‘르 휘가로'지는 이들의 화해를 이렇게 보도했다.


“20세기 이념의 재단에 청춘을 받친 최대의 사상가 사르트르와 아롱이 악수를 나누었다. 아롱은 ‘사르트르와 악수했을 때 봉주르, 친구야, 나는 반세기를 되돌아간 것 같다“



그리고 2017년 7월 2일 사르트르가 1946년 창간했던 좌파신문 ‘리베라시옹(해방일보)’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21세기에 레이몽 아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1960, 70년대에 우파였고, 사르트르는 좌파였다. 사르트르는 ‘리베라시옹’을 창간했고, 아롱은 ‘르 휘가로’의 논객이었다....”


‘리베라시옹’은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 슬프도다!”라는 1면 헤드라인 기사로 이를 보도하면서 사르트르 좌파사상의 패배를 선언했다.


‘리베라시옹’은 또 러시아의 레닌혁명 100주년 기념일(2017년 10월) 특집에서 “(공산당)의 동반자들의 거대한 환상”이란 제목으로 철저히 자아비판을 하면서 사르트르의 진보진영과 결별을 선언한 일은 특기할 만하다. “반파쇼투쟁에 참가해 러시아혁명을 찬양한 작가와 사상가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공산당체제의 범죄에 눈 감았다”고 규탄한 것이다.


좌파신문 리베라시옹이 아롱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시대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리베라시옹의 말 그대로 아롱의 사상을 21세기에 꽃 피운 사람이 바로 지금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다.


바로 프랑스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이 좌우중도의 대통합 정당 소속인 마크롱을 2017년 5월 대선에서 승리하게 만든 것이다.


마크롱의 ‘공화국을 위한 전진’당은 경제전문가는 우파, 사회복지는 좌파, 친환경은 녹색당, 안보는 군사전문가 등 각계각층에서 영입한 전문가로 완전한 국민통합당을 창당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롱 사상의 바람이 학계-지식인 중심의 포럼과 각 대학의 아롱연구센터중심으로 정치사상으로 마크롱의 정치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마크롱의 리더십은 어느 정권도 손대지 못했던 노동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공무원 30% 감원도 단행했다. 상업-기업의 규제를 모두 혁파해 주말과 6시 이후 영업의 자유를 보장해 최고의 관광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특히 세금탕감정책으로 기업과 중소기업-상인들의 날개를 달았다. 특히 아무도 손대지 못한 부유세도 폐지했다. 정권교체 때마다 ‘루이 뷔통’ 회장 등 부자들의 해외이민의 세금도피유행도 사라졌다. 고등공무원 양성소 고등행정학교(ENA)도 폐지했다. 국회의원 30% 감축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유권자는 더 많이 더 잘 하라고 마크롱을 채찍질 한다.


프랑스내에서의 좌파의 몰락이 프랑스를 더욱 프랑스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의 6.25북침론과 한국의 좌파]


시진핑은 지난 25일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 전쟁’ 70주년을 맞아 6.25를 가리켜 과거 중국군(중공군)의 참전에 대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강변했다.


시진핑은 “6·25에 중국이 참전한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것”이라며 “정의로운 행위 중의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가 일어났고, 중국군의 대대적 침공 탓에 전쟁이 장기화하고 분단이 고착화되었음에도 참으로 뻔뻔하게 오히려 한국을 불의한 제국주의 침략자의 일원으로 부른 셈이다.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없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시진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이인영 통일부장관은 23일 시진핑 발언에 대한 소감을 묻자 “제가 장관으로서 적절하다 마다 평가하는 건 외교적 관례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국내 좌파의 상당수 이념가들은 아직도 6.25를 북침으로 주장한다. 모든 것을 북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북한을 이해하려면 북한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內在的 接近法)’을 내세우면서 더욱 더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는 아롱이 비판한 ‘진보적 폭력론’이 우리나라의 좌파들에게 깊숙하게 주입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진보적 폭력론과 내재적 접근법은 결국 ‘사실(남침)’보다는 그것의 ‘해석(통일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궤변으로 변질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기도 하다.


한때 좌파가 주도하던 프랑스 사회에서의 이념논쟁은 이미 끝이 났다. 심지어 ‘국민적 사상가’로 추앙받던 좌파의 대부 사르트르가 파문을 당하고 그가 창간했던 신문 좌파의 핵심언론 ‘리베라시옹’은 스탈린의 공산주의에 대한 준엄한 규탄과 깊은 반성을 하면서 대국민 사과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1960년대의 프랑스 시대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한국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아롱이 말한 사회주의라는 ‘아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특히 아롱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거대한 소련을 침몰시킬 것”이라 예견했는데 지금 집권여당 민주당,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거대 공룡여당 민주당의 정치 행태를 보면서 왜 소련의 침몰이 연상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아롱이 ‘지식인의 아편’에서 지적한 구구절절 내용이 1960년대가 아닌 2020년의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참담하기까지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양 날개 비행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전제는 병 들지 않는 진보와 보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는 주사파 운동세력, 다시말해 종북 주사파가 지배하는 퇴행적 집단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바로 그들에게 레이몽 아롱이 사르트르에게 했던 경고를 지금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좌파는 미테랑, 브란트 같은 선진형 사회당과는 그 색깔도,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는 점이다. 그저 ‘주사파’일 뿐인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언론 ‘리베라시옹’은 이렇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여져 마르크스 이념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고대의 공룡들이 아직도 기어 다닌다”면서 규탄하며 경계했다.


속과 겉이 다른 한국의 좌파들이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나 건전한 좌파를 추구한다면 대한민국도 마크롱 같은 대통령도 나오고, 건설적인 좌우파 대립을 하면서 또다시 대한민국을 도약대에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동영상은 10월 27일 오전 8시에 공개됩니다] [이 글은 우리 신문 10월 17일자 [주섭일 칼럼]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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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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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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