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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한국 조롱한 시진핑, “6.25, 적을 이긴 정의의 승리” - 6.25를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 말하며 참전 정당화 - 역사를 왜곡하고 패배를 뒤집은 시진핑 - ’항미원조‘? 한국을 우롱하고 능멸하는 행위
  • 기사등록 2020-10-21 13:14:45
  • 수정 2020-10-21 20: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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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주석이 19일 베이징(北京)의 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항미원조 70주년 전시회`를 참관하는 자리에서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사진=중국정부망]


[6.25를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 말한 시진핑]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주석이 19일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고 강조하고 나섰다고 인민일보가 20일 보도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날 베이징(北京)의 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항미원조 70주년 전시회'를 참관하는 자리에서 "70년 전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서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항미원조와 국가 보위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진핑 주석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한 인민 및 군인들과 함께 싸워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면서 "이를 통해 세계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란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북한)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중국이 사용하는 단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을 도와준 전쟁을 넘어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이어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면서 "항미원조 정신은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모든 시련과 모든 강력한 적을 이겨내도록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주목할 것은 시진핑 주석이 말한 ’강력한 적‘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맥락을 살펴봤을 때 미국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시진핑 주석은 바로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북상하려던 ‘강력한 적’인 미군을 무찔러 이겼다면서 바로 그러한 혁명정신으로 중국몽을 이뤄가자고 선동한 것이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이날 “항미원조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혁명 정신을 모두 배우라”면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해 초심과 투쟁 정신으로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에 노력하자”고 강조한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패배를 뒤집은 시진핑]


시진핑 주석의 한국전쟁관은 한마디로 모두가 의도적 왜곡이고 역사를 뒤집으면서까지 ‘중국적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려는 오도(誤導)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북침으로 시작됐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시진핑 주석도 그렇게 말했다. 이미 붕괴된 옛 소련의 기밀문서로도 다 공개가 된 것이지만 중국이 애써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임을 강조하려다 보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역사를 왜곡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은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시작됐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김일성 북한 내각 총리가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새벽 4시 38선을 넘는 기습공격을 지시했다는 구소련의 문건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졌다. 이것이 팩트다.


*미군은 중국을 침략하려 했다?


중국은 또한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미군이 중국을 침략하려 해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항미원조’ 전쟁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도 분명한 거짓이고 역사왜곡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미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하면서도 중국 인민군이 한국전에 참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미군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군은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10월 19일 밤에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1차적으로 린뱌오(林彪) 휘하에서 국공내전 당시 동북지방(만주)에서 국민당군을 패배시켰던 정예 군대인 13병단 휘하의 38·39·40·42·50·66군 약 18만명이 강을 건넜다. 이들은 강을 건너 적유령·낭림 산맥 일대에 매복했다.


그러다가 10월 25일 아침, 중국군은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평북 대유동 폐광 골짜기에 설치한 사령부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지겹도록 엄청난 인원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남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첫 전투는 오전 11시경 평북 운산군 쪽으로 진격 중이던 국군 1사단과 벌어졌다. 우리 국군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런데 그날 전투에서 적군 1명을 생포해 심문했더니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중국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어를 아는 통역을 통해 심문했더니 운산군과 희천군 방면에 2만여명의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런 엄청난 인원의 중공군의 남하에 운산군 온정리에서 서진하던 국군 6사단 2연대, 성흥에서 장진호로 전진하던 국군 3사단 1개 연대도 매복공격에 각각 무너졌다.


이러한 중공군의 참전 정보는 즉각 미8군 사령부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급보됐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군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믿지 않았다. 아마도 정식 개입이 아닌 일시적 사건으로만 봤고 만약 개입을 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인해전술식의 어마어마한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10월 30일 청천강 상류 골짜기에서 국군 제2군단, 운산에 있던 미 제8기병연대가 각각 궤멸되는 참패를 겪는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11월 1일 북상하던 전 군에 대해 청천강 선까지 총퇴각을 명령했다. 이렇게 밀려나던 미군과 우리 국군은 결국 이듬해 1월 4일 서울까지 중공군에 내주게 된다.


이 당시 중공군이 썼던 인해전술은 U자 형태로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적이 그 안으로 들어오면 우회기동으로 먼저 적의 퇴로를 차단한 후 적의 가장 약한 고리를 집중타격하는 '포위·섬멸' 작전이었다. 이 전술이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장기였다.


중공군의 이러한 참전에 대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한때 중국본토에 대한 핵공격까지 검토했으나 본국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팩트다. 미군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려 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중국의 주장은 완전 거짓이다.


*중공군이 승리한 전투?


시진핑 주석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완전 거짓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공군의 급습으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내주고 남쪽으로 밀렸지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서울을 수복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북상하면서 결국 1953년 휴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쉽게 따져봐도 의기양양하게 남침을 하면서 남한을 장악하려던 북한의 속셈은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해 보려던 중공군의 계획 또한 좌절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희생당한 중공군 숫자는 그들이 이 전쟁에서 얼마나 참혹한 패배를 했는지 말해 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지난 19일 '197,653'이라는 숫자를 크게 표시한 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 전사자의 숫자라며 '우리는 잊은 적이 없다'고 썼다. 그러나 이 숫자는 중국이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숫자이지 진실은 아니다.


우리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자료를 보면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여명, 부상자 20만 8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공식자료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숫자는 연인원 24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비전투 요원 50만여 명까지 합친다면 무려 290만여 명이나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국방부 자료를 통해서 살펴봐도 참전한 중공군 3명 중 1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중공군이 뜻한 바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결국 중국이 말하는 항미원조는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패배한 전쟁이었다. 이것이 팩트다.


▲ 북중 국경 부근의 단둥에 재개관한 `항미원조기념관` 입구에 있는 마오쩌둥(毛澤東)과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 팽더화이는 중국의 인민지원군 총 대장이었다. [사진=항미원조기념관 캡쳐]

[’항미원조‘ 부각? 反美의식 및 애국주의 고취 의도]


베이징에서의 ’항미원조 70주년 전시회‘와 함께 북중 접경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이 지난달 20일 재개관했다.


기념탑, 전시관, 파노라마 화랑, 국방교육공원 등으로 구성된 부지 면적 18만㎡의 이 기념관은 재개관 이전보다 4배 정도 커졌다. 이 전시관에는 항미원조를 기본 테마로 한국전쟁 관련 사진 1000여점과 물품 1600여점 등이 전시돼 있다.


심지어 미군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부 지역에서 비밀리에 세균전을 벌였다는 거짓 주장까지 내세우면서 反美정신을 고취한다. 그러나 중국이 주장하는 미군의 세균전 주장은 옛 소련 문건에서도 "잘못된 정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는 항미원조 70주년을 기념하는 드라마들이 줄지어 방영되고 있다.


지난 12일부터 '항미원조 보가위국', 즉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하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제목의 20부작 다큐멘터리를 황금 시간대인 저녁 8시 중국 전역에 방영하고 있고, 18일부터는 '평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다른 다큐멘터리 6부작을 방영하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항미원조를 적극 홍보하고 심지어 시진핑 주석까지 나서서 강조하는 이유는 미국과의 패권전쟁 때문이다. 패배한 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왜곡하면서까지 주장하면서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려 하는 것은 한국전쟁을 보면 중국이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속내다.


그러나 중국이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해 가면서 ’미국은 침략자’라 칭하면서 반미정신을 고취시키는 이러한 애국주의적 발상을 전 세계가 어떻게 볼 것인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중국이 언제 그렇게 세계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 있었던가? 그것이 중국의 본질인 것을 말이다.


[’항미원조‘? 한국을 우롱하고 능멸하는 행위다!]


시진핑 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이 중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에 대해 승리한 전쟁이며 승리의 근원은 중국 국민에 있다”라고 한 대목은 중국의 본심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항미원조기념관 등에서 북한과의 혈맹을 과시하는 모습에서도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우리의 피해를 살펴보자. 우리 국군의 사망자는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이 한국전쟁으로 희생됐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이다. 남한의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가 그렇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의 결과다. 북한의 남침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특히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북한은 우리의 영토가 되어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그 모든 꿈까지 다 앗아갔다. 그로인해 우리는 분단 70년의 고통을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런 한국전쟁을 중국은 ’항미원조‘라 부르면서 참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내부 결집을 꾀하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럴 수 있을까? 중국의 항미원조 정신 부각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우롱하고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발끝의 때만큼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부로 다뤄도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북한의 로켓으로 위장한 미사일 발사나 대륙간 탄도탄 발사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하는 중국이 우리의 자체방어를 위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에 대해서는 도를 넘는 협박성 발언과 제재를 가했다. 우리는 '3불정책'(사드 추가 배치·미국 미사일방어체계 편입·한미일 군사동맹 폐지)을 중국에 약속하는 사실상의 외교국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에 읍소했지만 중국은 지금까지도 사드 보복을 지속하고 있다.


이번에는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7일 밴플리트상을 받으며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소감을 밝히자 중국 누리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교묘한 애국심 부각을 위한 중국 당국의 선동이 있었다.


이번에 또 중국 5위 물류기업인 윈다(韻達)가 최근 BTS 관련 제품의 운송을 중단했다는 글을 올리자 “진정한 애국 기업”이란 댓글이 뒤따랐다. 이 역시 교묘한 중국의 보복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중국 당국을 향해 변변한 대응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집권여당 민주당의 신동근 최고위원은 방탄소년단(BTS)의 발언과 관련해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의 발언이 그 나라의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적 상처를 건드리면 큰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와대가 중국의 BTS 비난에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한 국민의힘 김현아 비상대책위원에 대해서도 “참 당혹스럽다”며 “정부가 나서서 갈등을 더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냐”고 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신 최고위원은 BTS 발언이 ’중국의 자부심을 해치는 행위‘라고 했다. 이 발언은 '국가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비판한 중국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또 중국은 외교부까지 나서서 BTS 발언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관심을 고취시키고 있는데 우리 정부에게는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저자세와 무기력함이 중국의 오만을 불러 오는 것이고 강압적 태도로 일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은 한미동맹을 부정하고 새로운 중화질서 속에 한국을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이렇게 한국에 대한 강경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을 능멸한 것도 모자라 이를 칭송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 지금도 아주 만만한 나라로 대하면서 사사건건 중화질서 안으로의 편입되기를 원하는 중국을 한미동맹보다 더 우선시한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진짜 우리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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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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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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