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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0-03 05:33:12
  • 수정 2022-10-09 15: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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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궁금했다. 무엇일까.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성처럼 둘러선 보이지 않는 그 중심에서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그러나 위급하고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표정이 호기심이고 기대인 것으로 보아서 어떤 재미있고 신기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중심의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깨금발로 키 높이를 조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쌓은 성이 다섯 겹도 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금 느슨해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앞사람에 막히고 말았다. 키는 나보다 큰 것 같지 않은데 덩치가 커서 내 눈이 뚫고 들어갈 틈까지 아예 차단해 버렸다.


그때였다. ! 하고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 그렇다. 내가 일차로 시도해 보았던 깨금발을 여기서 써보면 되겠구나. 나는 최고로 내 키를 높이기 위한 깨금발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앞사람의 목을 피해 어깨너머로 그 궁금한 곳을 향해 눈을 주었다.

순간 내 입에선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때 또 한 번 환성이 터지고 다른 한쪽에선 에이!’ 하는 소리도 동시에 들려왔다. 윷놀이 판이었다. 공원에서 척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다 참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명이 빙 둘러 응원하고 관전하다 보니 군중심리가 사람들을 하나 둘씩 이만큼이 되도록 모이게 했을 것 같다.


어떻든 나도 더 이상 앞으로는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앞사람의 어깨너머로 윷놀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두 동이를 업고 가던 말이 거의 다 가서 지키고 있던 상대편 말에 잡혀버린 것이다.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걸리는 것 없이 보는 것보다 이렇게 어깨너머로 불편하지만 조금은 비밀스럽게 보는 이것이 훨씬 더 스릴 있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훔쳐보는 것도 아닌데 어깨너머로 보다보니 훔쳐보는 것 같은 스릴도 느껴진 것이다. 순간 어깨너머란 말이 아주 정겹게 다가오는 듯하더니 그러나 이내 서글프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얘기로 막내이모는 학교엘 가지 못했단다. 할아버지께서 큰 이모만 학교엘 다니게 했었는데 그걸 너무도 부러워한 막내이모가 몰래 언니의 뒤를 따라가 교실 밖 유리창을 통해 수업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한다. 여자에게 공부 시키는 것을 별로 장려하지 않는 때였기에 그랬겠지만 왜 큰 이모는 학교에 보내고 작은 이모는 못 가게 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하여간 막내이모는 언니의 어깨너머로 선생님과 칠판을 훔쳐보며 몰래 도둑공부를 했다. 그리고는 언니보다 일찍 집으로 와 모른 체 했단다. 그래도 많이 영특했던지 도둑공부로도 거의 다 내용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할아버지를 잘 아시는 교장선생님께서 보게 되었고 교장선생님이 이 사실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린 덕택에 4학년 2학기로 편입이 되었다고 했다. 어깨너머로 하던 공부를 교실에 들어가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때 이모의 기쁨이 오죽 컸으랴.


어깨너머란 말의 뜻은 남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거나 듣거나 함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배우지 못한 기술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깨너머란 말 속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 내가 가면 안 되는 곳, 나를 막는 것이 있는 곳이라는 안타까운 뜻이 숨어있다. 그래서 슬픔의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할 수 없던 옛 소설 속 안타까움 같은 슬픔이랄까.


나는 그 어깨너머란 뜻도 제대로 모르던 어린 날에 어깨너머로 슬픔을 삼킨 적이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펼쳐놓고 먹고 있던 친구의 모습, 친구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보이던 먹을거리와 그걸 즐겁게 맛있게 먹고 있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특히 먹는 걸 바라보며 흐뭇함 가득 등을 두드려 주면서 입에도 넣어주는 그 어머니의 모습에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곤 했다. 또 한 번은 중학생 때였다. 친구가 결석을 하여 무슨 일인가 가보라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친구의 집을 찾았다. 인기척을 내도 아무 소리가 없어 뚫린 창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누워있는 친구의 이마에 물수건을 해주고 있는 친구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보이던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저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겠구나 생각이 들며 울컥 넘치고 마는 눈물을 억제 못 한 체 뛰쳐나오고 말았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슬픈 영상으로만 어깨너머가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산타모니카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이 보여 궁금해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둘러쳐진 사람들의 뒤 어깨너머로 한 광경이 보였다. 오른 팔이 없고 왼팔 하나만 있는 젊은이가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정교하게 그리고 얼마나 빨리 그리는지 실로 놀랍기만 했다.

원래 화가였는데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는지, 한쪽 팔이 없어서 생계를 위해 그림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보통의 솜씨가 넘는 그를 똑바로는 보지 못하고 앞사람의 어깨너머로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표정이 어찌나 평온하고 당당하고 장난기까지 넘치는 귀여운 모습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아주 맑고 밝은 모습이었다.

그는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다기 보다 자신이 찾아낸 가장 좋은 면을 부각시켜 그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자연 그림 속의 표정도 밝아지고 천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발길을 돌리면서 살짝 앞사람의 어깨너머로 그를 한 번 더 훔쳐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라도 부르는 것 같았다.


어깨너머, 사람들은 좋지 않은 쪽에서 어깨너머로 훔쳐본다. 그러나 어쩌면 어깨너머란 너무 겸손하고 너무 착해 보란 듯 나서지 못하는 수줍음의 동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당당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요즘인데 어깨너머로나 참여할 수 있는 수줍음은 오히려 귀하지 않을까.

키보다 높은 담 너머로 안타깝게 깨금발을 하며 지나가는 결혼 행렬을 훔쳐보는 옛 풍속도 속의 한 여자아이가 나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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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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