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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0-03 0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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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밤새 비가 거칠게 내렸다. 여간해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집안에서 지붕과 벽을 때리고 창문을 흔들어대는 비바람을 느끼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곤두섰던 신경은 하루의 피로가 부른 잠으로 어느새 느슨해졌다. 그래, 여기는 안전한 나의 집이지. 오래된 기와 사이로 비가 새는 시골집도 아니고, 수해를 당한 개울가의 집도 아니고, 걸핏하면 물이 드는 반 지하 집도 아니고, 철거를 당해 임시로 지은 시멘트 블록집도 아니고, 황토 빗물이 쏟아져 내리는 언덕 위의 집도 아니지. 나의 집에 대해 안전함과 푸근함을 느끼는 사이 꿈나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늘 일상과 집을 떠나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던 때와 달리 반 년 간 거의 집에 머물러야 하고, 다른 나라에 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집의 표정과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오래된 빌라이지만 빨간 파벽돌로 튼튼하게 지어 벽의 두께가 50~60 cm에 이르고 사시사철 각종 꽃나무와 고목인 모과나무, 배롱나무, 노송에 둘러싸인 집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푸근한 품을 느낀다. 비록 전철 역세권이 아니라 집값이 오르지 않는 공동주택이지만 지난 15년 간 높은 천정과 다락방 서재가 준 위로와 영감은 값으로 따질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 또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지금 사는 집은 시내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서 좋지만 둘이 살기는 큰 편이라 아들 하나를 더 독립시키고 나면 적당한 집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결혼 후에 여덟 번 이사를 했다. 그 중 이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정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나의 다음 집은 어디 있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집을 헤아려 보니 무려 스무 군데다. 그 중에서 반은 세를 살았다. 친정아버지는 작은 집을 세 번 지으셨다. 한 번은 수해로 집을 떠내려 보내고, 한 번은 철거를 당했으며, 7년 동안은 가족을 이끌고 인도네시아에 나가서 살았다. 은퇴 후 마지막 살던 집은 고향의 본적지에 지은 집이었다. 집 옆에는 퇴직금으로 사신 매실나무 밭이 있다. 매실나무에서는 지금도 매화가 홀로 피고 지고 매실이 열리지만 찾는 이가 없다. 아버지는 공직에 계시며 주택과 관련 깊은 일을 하셨음에도 내 집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한 기간이 길지 않다.


옛 건설부의 주택국장을 하실 때는 아파트 신청을 넣었다가 17번이나 떨어졌고, 주택공사 부사장일 때는 한남동의 수해와 철거로 상계동에 집단 이주했다가 다시 신도시 개발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 데모대와 만나 고충을 듣는 자리에 공사 대표로 나가셨다. 그때 철거민 대표로 마주 앉은 사람이 한남동에서 수해와 철거를 당해 상계동으로 함께 이주 했던 옆집 표씨 아저씨였다. 사는 동안 울타리 없이 마당을 공유하며 주말에는 막걸리를 함께 마시던 이웃집 아저씨는 눈물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손을 마주 잡았다. 집을 두 채, 세 채 씩 소유하고 투기를 하는 관료를 만났다면 지난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과 분쟁이 서로의 이해 속에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 분은 우리 사정을 아신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해외건설관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동남아와 중동지역에 건설 수출을 하고, ‘무주택자를 위한 UN 한국 대표를 지내며 전 세계 무주택 지역의 회의에 다니며 평생 유랑한 아버지의 꿈이 고향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서 그러셨을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적은 연금을 남기고 퇴직금으로 고향의 옛 집터를 사서 노후에 보낼 집을 지었다. 그곳에 산지 불과 3년 여, 69세의 이른 연세에 선산 유택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시골집은 너무 멀고 어머니 혼자 살기 외진 곳이라 어머니는 아버지 병구완 차 올라오셨다가 결국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시는 중이다. 결혼생활 45년 간 알뜰하게 모은 짐과 집을 두고 어머니의 고향 서울에서 20년 간 야영을 하는 셈이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집착하는 어머니께 좋은 집을 사드릴 능력은 없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기로 했다. 늦었지만 절차를 통해 며칠 전에 참전용사인 아버지의 국가유공자증서가 나왔고 외롭게 홀로 계신 아버지를 호국원에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내가 호국원에 아버지와 함께 묻히는 게 소원이다.’ 하며 안도의 숨을 쉬셨다.


헤아릴 수 없는 부모님의 희생과 유랑이 뒷받침이 되어 비교적 일찍 나는 안전한 집을 가졌다. 이제 남은 일은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로서 어머니의 여생을 함께할 노인공동생활주택의 설립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다. 다음 집이 어디일지, 어떤 풍경일지 날마다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집 한 채가 나의 안전한 방주이고 유일한 밑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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