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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7 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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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랑스가 19세기 후반부에 앙페르를 잇는 뛰어난 전자기 물리학자를 키우지 못했을까요?
-19세기 프랑스는 ‘혁명의 반복’ 속에서 내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력의 불꽃을 태워버렸어요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인구가 국민의 50% 넘으면 과학은 발전하기 어렵다는 역설 성립




전기와 자기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생각은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변에서 놓인 자석이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의 말로 해석하면, 이 현상은 전류(운동하는 전하)가 도선 주변에 자기장을 만들고, 이 자기장이 자석에 영향을 주어서 이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 발견이 유럽 과학계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상 최초로 전기와 자기 사이의 연관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앙페르의 동료였던 프랑수아 아라고(François Arago)는 1820년 9월 11일에 과학 아카데미에서 외르스테드의 실험 결과를 보고했는데, 아라고의 보고를 들은 앙페르는 곧바로 자기(magnetism)가 전기의 운동임을 파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 자크 앙페르 [André-Marie Ampère] – 19세기 전자기학의 기초를 놓은 과학자 (과학인물백과)



중국인의 삼십육계 수준 지혜속에는 화룡점정의 법칙이 있습니다. 마지막 점 하나 찍는 것으로 업적을 올린다는 것인데 사실, 주군이 이룬 업적을 가로채 그 위에서 최고의 지위를 얻는다는 계책입니다. 이렇게 한 대표적 인물이 송태조 조광윤입니다.

 

그가 황제 되기 전 거의 중국대륙의 4분의 3 정도를 평정한 뛰어난 황제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주의 세종 시영이었습니다. 퍼포먼스 기획에 뛰어났던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 기획에 의한 진교정변은 ‘언론플레이’라 할 정도로 일종의 퍼포먼스였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보다도 더 손바닥 뒤집기로 쉬우면서도 연극적 색채가 강력한 정변이었습니다. 물론 조광윤은 시영의 아들이었던 시종훈과 그의 모친인 황후를 조용히 내려보냈으니 문치주의 창시자답기는 합니다.

 

과학사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너무 심해서 그야말로 다른 연구자의 업적 가로채기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앙페르의 작업도 그러했습니다. 이 경우는 가로채기라기보다는 탑의 기반만 닦아 놓고 1층, 2층, 3층을 올리지 않은 채 중단한 작업을 지속했다는 속성이 더 강력합니다. 그는 외르스테드의 실험 소식을 아라고에게 전해듣고 곧바로 더욱 정교한 실험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더 정교하게 수학화된 앙페르의 법칙을 발표하기에 이르릅니다.

 

외르스테드는 과학의 역사상 엄청나게 대단한 발견을 해 놓고서 까닭없이 손을 놓아서 후속 법칙 발견의 영예를 앙페르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앙페르는 부친이 왕당파였고 루이15세 왕정복고 시기에 자코뱅 파들을 검거하는 경찰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유명한 푸세 내무장관 밑에서 경찰 일을 하면서 자코뱅 파 검거 일을 하다가 루이15세와 부르봉 왕조가 쫒겨나면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러니 앙페르가 온전하기 어려웠고, 의지했던 아내마저 잃었으니 이 타고난 천재가 일상생활 영위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은 자명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프랑스의 물리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19세기 앙페르에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전기의 시대’는 선행해서 전자기학의 숱한 발견에 기반하여 성립했고 오늘날 제2차 산업혁명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전자기학에 대한 기여는 앙페르가 끝이었습니다. ‘전기의 시대’를 열었던 두 나라가 당연히 떠오릅니다. 독일과 미국이 그들이며 영국도 그리 뒤쳐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론 분야에서 맥스웰과 같은 학자가 두드러질 뿐, 발명과 전기산업의 거대한 확장에는 미국과 독일에 앞서갔습니다. 19세기 말에는 뛰어난 물리학자가 전기공학을 공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러했고 디랙도 전기공학에서 물리학으로 넘어왔습니다. 독일에서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가 많이 나왔는데 그 아버지 격인 ‘독일의 톰슨’인 막스 플랑크도 조명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왜 프랑스가 19세기 후반부에 앙페르의 뒤를 잇는 뛰어난 전자기 물리학자를 키우지 못했을까요? 루이14세의 1685년 낭트칙령 폐지 때문에 다시는 빠리를 가지 못하게 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생각납니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스승이었던 라플라스를 중심으로 라플라스 물리학주의를 형성했고 이는 뉴턴의 제곱에 비례하는 중력을 물리현상 전반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의미했습니다. 앙페르가 이 흐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셈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라플라스의 플랜도 사라져갔습니다.

 

▲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국력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버린 것 같습니다


19세기 프랑스는 ‘혁명의 반복’ 속에서 내정이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외부의 위협에 적절히 대처하는 가운데 문물이 발전합니다. 학문도 문물에 속합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국력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버린 것 같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의 패전과 함께 라플라스 물리학이 저물고 앙페르를 마지막으로 이후, 1920년대의 드 브로이가 나오기까지 이렇다 할 물리학자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얼마나 후퇴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20세기의 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영국과 독일 물리학자들 중심으로 성립했습니다. 특히 독일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의 로렌쯔나 덴마크의 보어가 눈에 띌 뿐입니다.

 

앙페르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면서 19세기 프랑스의 물리학도 종료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프로이센이 통일 독일로 확장되면서 물리학의 중심지는 독일로 바뀝니다. 그리고 변방의 미국에서 에디슨이나 헨리 같은 전기 발명가들이 이론가 이전에 먼저 출현하여 제2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는 발명을 만들어냅니다. 독일에서도 옴, 뢴트겐, 브라운 같은 발명가들이 출현했습니다. 영국은 발명보다 이론적 종합을 행한 맥스웰이 대표적입니다.

 

프랑스가 자유의 정신을 지나치게 보유하면서 반복되는 혁명을 ‘자유를 향한 프랑스인의 함성’처럼 여기는 경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앙페르의 후손은 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인구가 국민의 50%를 넘으면 과학은 발전하기 어렵다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맑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창했지만 그 후계자들은 결코 과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정말 심하게 작동합니다. 이는 정치권력에 대한 탐욕의 무분별한 작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물리학에서 노벨상 수상자 한 사람 내지 못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려면 오직 물리학만 공부하는 학맥이 형성되어 50년 정도는 지속적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 방면으로 충분한 재정지원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코펜하겐연구소를 세워준 덴마크 정부 같은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런 현학적 논의가 무슨 쓸모가 있냐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은 다 끝납니다. 한국의 진보가 제발 이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가미오간테 같은 것은 짓지 않아도 좋으니 스마트 원전 기술을 포기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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