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0-07-20 17:45:42
기사수정


▲ 공군 창설 주역인 장지량 장군 [사진=Why Times DB]


1924년 생인 장지량(張志良)은 1945년 8월15일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을 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60기 생도였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육군사관학교를 5기생으로 졸업하여 공군소위로 임관한 뒤 6.25 전쟁 기간 중 한국 공군 창설의 역군(役軍)이 되었다.


공군 중장으로 제9대 공군참모총장을 거쳐서 예편한 그는 그 후 이디오피아와 필리핀 및 스웨덴 주재 대사를 거쳐서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 10대 국회의원(1979~1980)과 성우회(星友會) 회장을 역임한 뒤 2015년 타계(他界)했다.


다음은 장지량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필자는 이 수기의 내용을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일독(一讀)해 볼 것을 권한다. 고인(故人)이 된 백선엽(白善燁) 장군에 대한 일부 세론(世論)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친일파(親日派) 마녀(魔女) 사냥’의 광풍(狂風) 속에서, 물론 ‘골수 친일파’의 경우는 당연히 예외가 되어야 하겠지만, 좁게는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던, 그리고 보다 넓게는 일본의 식민통치 지배구조에 참가했던 그 당시의 많은 젊은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에는 어떠한 고뇌가 있었고 미래에 대한 어떤 몽유(夢遊)의 세계가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는 없는 것인지를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만약 오늘의 젊은이들이 그때의 ‘조선 젊은이’들의 생활을 살아야 했었다면 그대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을 것인지를 스스로 상상해 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터이다. [李東馥 근백]


[장지량 장군의 일본육사 생도 시절 일기 ‘내정일지(內情日誌)’와 '과거사 마녀(魔女)사냥']


“1944년 2월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입교 3년 선배인 57기의 김영수(金泳洙)ㆍ김호량(金鎬粱) 두 선배가 졸업식을 끝내고 일선으로 배속되어 가기에 앞서서 60기인 우리들 6명의 후배를 찾아 왔다. 뜻밖의 일이었다. 우리들 8명의 선ㆍ후배들이 만난 장소는 우리가 각기 속했던 중대들 사이의 중간거리에 있는 정원의 숲속이었다. 이 모임은 우리들 선ㆍ후배 간에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모임이었다. 이날 우리가 모인 시각은 일석 점호가 끝나고 모든 학생들이 취침에 들어간 이후의 늦은 시간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60기 동기생들은 장지량(張志良)[본인: 광주서중 4학년 수료]ㆍ이재일(李在鎰)[경기중 4학년 수료]ㆍ조병건(趙炳乾)[경복중 5학년 졸업]ㆍ김태성(金泰星)[동래중 5학년 졸업]ㆍ이성구(李聖九)[청주중 5학년 졸업]ㆍ이연수(李蓮洙)[성남중 5학년 졸업]였다. 이날 두 선배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들 6명의 후배들에게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한 조선인(朝鮮人)으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음 몇 가지의 훈계를 해 주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그때의 훈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우리는 영원한 동지다.
- 일상생활이나, 학과(學科)나 술과(術科)를 막론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서 일
본인 생도들에게 지지 말라.
- 이번 전쟁에서 일본은 반드시 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국을 되찾을 것이다.
- 우리는 일본 천황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다.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 우리는 하루 빨리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국군을 건군해야 한다.
- 앞으로의 전쟁은 항공이 절대적이다. 반드시 항공과를 선택하고 조종사가 되라.


이 때 우리에게 이 같은 훈계를 남긴 두 선배 중 김영수 선배는 김석원(金錫源) 장군의 차남으로 2차대전 종전 직전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전사했고 김호량 선배는 해방 후 생환하여 국군 포병장교로 6.25 전쟁 중 전사했다”


이상은 일본 육사 60기로 해방 이후 한국 공군의 창건에 참여하여 공군 중장까지 진급하고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지량 장군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1944년1월-1945년8월15일)의 생활을 기록에 남긴 '일본 육사 생도 시절의 내정일지(內情日誌)'의 한 대목이다.


이 수기(手記) 속에서 우리는 왜정시대 ‘반도인(半島人)’으로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던 ‘조선인’ 청년들의 내면(內面)을 읽게 된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과거사 들추기’의 마녀(魔女) 사냥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 마녀 사냥은 왜정시대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생활을 했던 모든 ‘조선인’ 청년들에게 ‘친일파’의 멍에를 씌움으로써 그들을 부관참시(副棺斬屍)하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수기의 한 대목 속에서 우리는, 왜정시대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던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 악질적인 친일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쩌면 보다 많은 ‘조선인’ 청년들은 그들이 낳아서 자라야 했던 시대적 상황에 쫓겨서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하면서도 내면의 고뇌를 통해 주어진 환경을 역으로 이용하려는 ‘조선인’의 ‘혼(魂)’을 기르고 가꾸고 있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도덕과 양심의 고지(高地)에 서 있는 것인가.


장지량 장군의 ≪일본 육사 생도 시절의 내정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예과 사관학교 입교 후 우리 60기 동기생 6명은 동경 시내의 영친왕(榮親王) 궁(宮)으로 초대를 받았다. 당시 영친왕은 일본육군 중장(中將)이었으며 부인은 방자(方子) 여사로 일본인 왕족이었다. 다과를 대접받았다. 대화는 별로 없었고 ‘반갑다. 건투하고 잘 하라’는 정도였다.


“당일은 동경 시내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육군과 항공대의 대대적인 관병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본과 및 예과)와 항공사관학교 생도 전원이 사열대에서 불과 10m 후방에 정렬하고 있었다. 일본 천황은 사열대 단상에 백마(白馬)를 타고 서 있었고 영친왕은 단하에 반백마(半白馬)를 타고 서 있었다. 실로 감개무량하였다. 왜 우리 황제는 저렇게 되었는가 하는 상념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슴 속을 메웠다.


“일본 육사 입교 이후의 생활은 고향의 그것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고향의 중학교 생활은 항상 ‘황국신민화’의 생활 압박으로 매일 ‘황국신민의 선서’ㆍ‘일본 국기 게양식’ㆍ‘일본 국기에 대한 경례’ㆍ‘일본국가 합창’ㆍ‘일본어 상용(조선말 사용 금지)’ㆍ‘창씨개명(創氏改名)’ㆍ‘신사참배’ 등으로 상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사관하교 입교 이후는 이 같은 강요된 일상생활이 일체 없어졌다. 그 대신 일본 군인으로서의 기본적 교육이 강요되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천황 궁성 요배 (매일), ‘군인 칙유(勅諭)’ 봉독 (매일) -- 천황 절대의 충성심 강요
- 생도용 각종 무기, 피복, 비품은 천황의 하사품으로 취급되었다. [예컨대 각자 소유의 소총의 약실 상면에는 천황의 문장인 ‘국화 문장’이 그려져 있는 것 등]
- 생도들에 대한 급양은 질량 공히 최고 수준
- 교수부의 각 교수는 최고 수준으로 엄선된 진용 [각급 간부들은 교장 이하 생도 대장, 중대장, 구대장, 하사관에 이르기까지 엄선된 우수한 인원들]
- 총기에 대해 손상 또는 분실이 발생할 때는 엄벌(영창)이 가해졌음.


“이 같은 철저한 정신교육을 통해 강한 군인정신이 함양되었다. 일본의 군인정신 양성 과정을 우리 처지에 견주어 볼 때마다 비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조국의 선배 세대들의 시대를 회상하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선배들을 원망할 때도 적지 않았다. 이조 말엽 한일합방을 강요당했을 때 우리 선배들의 황제는 어째서 우리 선배 군인들에게 일본 천황이 일본 군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대우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지 않았던 것인가."


“유년시절 내가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우리 군인들에 대한 황제와 왕실의 관심은 너무나 소홀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뇌리에는 우리 왕실이 우리 군대를 너무 푸대접하고 소홀하게 취급했다는 상념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조부의 형제들은 1888년 모두 무과급제를 했고 그 가운데 한 분은 ‘선략장군수군만호(宣略將軍水軍萬戶)’ 계급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하교에 대한 일본 천황의 관심은 대단했었다. 그 결과로 일본군의 모든 핵심 간부들은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 밭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 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구 한말(韓末) 시절 군인다운 행동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일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동급생 두 사람과 항상 장차 우리 민족이 잘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지고 끊임없이 얘기했었다."


“오혁종(吳赫鍾) 군은 민족의 70%가 농민이니까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결국 수원 농과대학을 졸업하여 농학박사가 되었고 유광호(柳鑛鎬) 군은 장차 상공업이 융성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서울대 상대를 나와 은행장이 되었으며 나는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국 일본 육사로 길을 잡았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일본의 식민지인 우리가 어떻게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었다."


“일본 육사 예과 시절 나는 이재일 군과 항상 의기 상통했었다. 많은 시간을 둘이서 연병장을 산책하면서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았었다. 우리들의 끊임 없는 화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 때 주고받은 얘기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는 해방된다. 그때 지도자는 이승만(李承晩) 박사일까? 김구(金九) 선생일까? 김일성(金日成) 장군일까? 아니면 영친왕일까? [단, 그때 우리가 화제 삼았던 김일성은 지금의 김일성이 아니라 일본 육사 23기생인 김광서(金光瑞)였다.]

- 독립된 우리나라의 정체(政體)는 제국(帝國)일까? 왕국(王國)일까? 민주공화국일까?
- 지도자의 명칭은 총통일까? 황제일까? 대통령일까? 등등


“그러면서 우리 두 사람은 우리가 장교로 임관되어 임지에 간 이후 혹시 망명을 하게 될 때는 ‘망명지는 만주, 몽고 또는 소련으로’ 하고 가명(假名)을 ‘나는 장동일(張東日) 또는 동일(東一)로’ 하고 ‘이재일은 이동일(李東日) 또는 동일(東一)로’ 하자, 언어도 나는 중국어와 몽고 말을 배워 두고 이재일은 러시아어를 배워 두자, ‘우리나라가 독립하게 되면 국군에는 육ㆍ해ㆍ공군을 두고 소형 원자탄과 제트 비행기를 구비하도록 하자, 동맹 관계를 중시하여 전승국(戰勝國)의 군대와 동맹 관계를 구축하도록 하자’ 등등을 화제로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나갔었다.”


19세기 이후 우리 민족이 걸어야 했던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기구했던 과거사가 이제 ‘과거사 진상규명’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그때를 살아야 했던 우리 선대(先代)들의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족적(足跡)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裁斷)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의 한 조각을 장지량 장군의 수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장 장군의 동기생 6명과 그 뒤 산화(散華)한 두 분의 선배들이 일본 육사의 정원에서 ‘조선’ 청년으로서의 고뇌를 서로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이 일본군 소위 이상의 계급장을 붙였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을 ‘민족 반역적인 친일파’로 단죄하겠다는 무리들의 ‘선대(先代)’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들이 저들을 단죄하기에 앞서서 그들의 ‘선대’들의 왜정시대 족적(足跡)을 우선 까밝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6593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치더보기
북한더보기
국제/외교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