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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13 12: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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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5 총선에 대한 부정선거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4,15총선 개표현장 [사진=뉴시스]


5월11일 조간 '조선일보' 27면에 보도된 “최보식이 만난 사람 – 김대년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기사를 읽었다. 제목이 “개표 과정 모두 한통속이 돼야 조작 가능 ··· 선관위, ‘음모론’ 확산될 여지를 줘”이다.


이 대담 내용의 핵심은 이 기사의 첫 대목에 정리되어 있다. 김대년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의 입을 빌어서 4.15 총선거 이후 확대일로에 있는 선거 결과 조작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기사는 김대년 씨의 다음과 같은 단정적인 이야기로 시작된다.


“총선 결과는 몹시 이례적이지만 조작 가능성은 0%라고 단언한다. 실시간 개표 상황표를 벽에 붙여 놓았는데 어떻게 조작이 가능하겠나. 그러려면 선관위 전 직원, 개표 사무원, 정당 추천위원, 참관인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이 같은 김대년 씨의 주장에 얼른 수긍할 수 없는 저항감을 느꼈다. 왜냐 하면 지금부터 60년 전인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선거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필자는 '한국일보'의 영문 자매지(姉妹紙)인 'The Korea Times'의 국회와 정당 출입 기자로 3.15 정·부통령 선거 과정을 일선에서 취재, 보도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는 4.19 학생의거를 거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진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대의 정치파동을 촉발한 사건이었다. 이 엄청난 정치파동은 3.15 선거 투표일인 3월15일 오전 11시경 전국적으로 가장 야당 성향이 현저했던 항구 도시 마산(馬山)에서 투표 번호표를 받지 못한 시민들이 시청에 몰려가서 번호표를 달라고 요구하는데 대해 경찰관들이 발포하여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렇게 촉발된 부정선거 논란은 투표 다음다음날인 3월17일 부통령 당선이 선포된 이기붕(李起鵬)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총(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망언(妄言), 그리고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쪽 눈에 불발 총류탄(銃榴彈)이 박혀 있는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신이 인양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가열화(加熱化)된 끝에 4월18일과 19일 서울에서의 대규모 학생 시위를 거쳐서 4월26일 이승만(李承晩)의 하야 성명과 4월28일 이기붕 일가의 집단 자살, 그리고 4월28일 이승만 내외의 하와이로의 망명(?)으로 이어진 격동의 드라마가 숨 쉴 사이 없이 연출된 끝에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었다.


이 같은 정치파동을 촉발한 1960년3월15일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부정선거의 실체는 ‘4할 사전투표’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규모로 자행된 대규모 ‘투표 부정’ 행위였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선거 업무를 총괄했던 내무장관 최인규(崔仁圭)는 경찰력과 행정기관을 총동원하여 전국의 모든 투표구에서 유권자 가운데 4할에 대해 투표 번호표를 배부하지 않고 그 대신 투표 번호표가 배부되지 않은 4할의 투표지에 ‘대통령 이승만’·‘부통령 이기붕’으로 기표(記票)하여 사전에 투표함에 투입하는 방식으로 감행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조직적인 부정 투표지의 사전 투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예측하지 못했던 ‘사고’가 발생했다.


전국의 투표구 가운데는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야당 성향’일 뿐 아니라 ‘야당 성향’의 경찰 및 행정 관리들이 포진하고 있는 투표구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야당 성향이 강했던 마산과 같은 곳에서 투표일 오전에 투표 번호표를 수령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시청으로 몰려가서 적극적으로 번호표의 배부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의 총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의 투표구에서는 “4할의 유권자들에 대해 투표 번호표를 배부하지 말라”는 지침이 이행되지 않은 채 투표가 실시된 결과 3월15일 밤 개표를 위하여 개함된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지가 해당 투표구 유권자들보다 많아지는 사례들이 속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전국의 투표구 가운데 실제 투표율이 60%를 상회한 투표구에서 전 유권자들에게 번호표가 배부되었을 경우에는 투표함에 투입된 투표지 수가 유권자들의 수를 상회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1960년3월15일 밤 전국의 투표구 별로 진행된 개표 과정에서 100%를 초과하는 ‘투표율’을 보인 투표구에서는 투표함의 투표지 수를 유권자 수 이내로 조정, 보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작업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3.15 정·부통령선거의 개표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보다 특히 이기붕 ‘부통령’의 득표수를 조정하는데 소요된 시간 때문에, 그 이전의 정·부통령 선거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 끝에 투표일 다음다음 날인 3월17일 새벽에야 이기붕의 당선이 확정되어 공표되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 같은 부정선거의 결과는 끔찍했었다. 1960년 부통령직을 놓고 벌어진 이기붕(자유당)과 장면(張勉·민주당) 사이의 대결은 1956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56년의 쳣 번째 대결에서의 두 사람의 득표수는 장면 4,012,654표 대 이기붕 3,805,500표로 표차는 207,154표였다. 그러나, 승패가 역전(逆轉)된 1960년 두 번째 대결에서의 득표수는 이기붕 8,337,059표 대 장면 1,843,758표로 표차가 무려 6,493,601표로 늘어났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4할 사전투표’의 위력이 과시된 결과였다.


그런데, 1960년3월15일에 일어난 이 부정선거는 어디까지나 아날로그 방식의 ‘투표 부정’ 행위였다. 5월11일자 <조선일보>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에 등장하여 “실시간 개표 상황표를 벽에 붙여 놓은 상황”을 거론하면서 이 상황에서 ‘조작’이 이루어지려면 “선관위 전 직원, 개표 사무원, 정당 추천위원, 참관인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그렇기 때문에 조작 가능성은 0%”라고 단정한 김대년 씨의 주장은 바로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 때 등장했던 아날로그 방식의 ‘투표 부정’ 행위의 잣대로 4.15 총선거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김대년 씨의 이 같은 주장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번 4월15일 실시된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혹으로 제기되고 있는 선거부정 행위와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때의 선거부정 행위 사이에는 근본적인 성격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4.15 총선거 후 국내외의 저명한 통계학자들은 이번 4.15 총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자기기에 의한 “후보별 투표지 분류”와 “후보별 득표수의 집계” 과정에서 지역별로 상이한 일정한 ‘보정 값’을 사용함으로써 미래통합당 후보의 득표수에서 일정한 비율의 표를 덜어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가산(加算)하는 방식으로 “득표수를 조작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같은 “개표 부정”을 통하여 163명(우호적 군소 정당 당선자를 포함하면 190명)의 당선자를 만들어 냈으며 반대로 미래통합당 소속 당선자를 84명(우호적 군소정당 당선자를 포함하면 107명)으로 위축시켰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 결과인 것이다.


김대년 씨는, 문제의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의 대담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무지의 탓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때의 선거부정 행위가 ‘투표’ 과정에서 자행된 아날로그 방식의 ‘투표 부정 행위’였던 데 반하여 이번 4.15 총선거 때의 선거부정 행위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디지털 방식의 보다 더 대규모의 ‘개표 부정 행위’였다는 차이를 외면하고 이번 4.15 총선거 결과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분석하여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몇몇 지역구에서, 산발적이거나 아니면 좀 더 광범위한 규모의. 아날로그 방식의 ‘투표 부정 행위’가 자행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단편적인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어서 앞으로 진행될 선거 소송의 결과에 따라서는 일부 선거구에서의 당락(當落) 변동이나 선거무효에 의한 재선거 실시 가능성이 배제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 4.15 총선거의 특징은 그 같은 아날로그 차원의 지엽적인 ‘투표 부정 행위’가 아니라 ‘투표지 분류기’와 ‘전산 장치에 의한 집계’ 과정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진 ‘개표 부정 행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 있는 만큼 김대년 씨처럼 “벽에 붙어 있는 개표 상황표”라던가 “선관위 전 직원, 개표 사무원, 정당 추천위원 및 참관인들”을 문제 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선거소송의 진행 과정에서 이 같은 디지털 차원의 전국적 규모의 ‘개표 부정 행위’가 사실로 입증이 될 경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4.15 총선거의 전면적 무효와 전면적 재선거 실시 논란을 점화(點火)시키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제 4.15 총선거의 실체를 가려내는 노력이 지향하는 향후의 단계는 가급적 많은 수의 복수의 선거구에서 실시되는 선거무효 소송이다. 그 선행 단계로 미래통합당의 민경욱 낙선자가 선두가 되어서 몇몇 선거구에서 증거보전 신청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선거무효 소송에서 다루어져야 할 의혹의 주요 대상은 투표함 속의 투표지 재검표를 통하여 후보별 실제 득표수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집계되어 있는 득표수 사이에 통계학자들이 추정하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파악하는 것과 함께 ‘투표지 분류기’와 ‘후보별 득표수 집계 및 전송용 전자 장비’들에서 득표수 ‘조작’이 이루어진 전자적 흔적을 찾아내는 것의 두 가지이다.


이 같은 두 가지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미래통합당의 후보자 당사자나 미래통합당이 공직선거법 제222조①항에 의거한 선거소송을 대법원에 제기하고 이와 병행하여 관할 지방법원 또는 지원에 “투표함·투표지 및 투표록” 등의 증거물에 대한 증거보전을 신청해야 한다.


그런데, 4.15 총선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의 하나는 미래통합당은 물론 미래통합당 소속 낙선자들의 선거소송 및 증거보전 신청에 대한 관심이 뜻밖에 저조하다는 것이다. 4.15 총선거 선거소송 시한은 선거 후 30일이 되는 5월15일이다. 이 시한을 5일 앞두고 있는 5월10일 현재 대법원에 제기된 선거무효 소송은 16건, 관할 법원에 제기된 증거보전 신청은 17건인 것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삼 기억에 떠오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1960년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許政)의 과도정권이 7.29 총선거를 통하여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장면 정권이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퇴출될 때까지 3.15 정·부통령선거를 통해 저질러진 대표적 선거부정이었던 ‘4할 사전투표’는 사법적 단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4할 사전투표’ 행위에 대한 군사재판을 통하여 최인규가 그 책임자로 단죄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1961년 군사정권이 등장한 뒤의 일이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이번 4.15 총선거의 경우 통계학자들을 경악시킨 전국적인 규모의 디지털 식 ‘개표 부정 행위’가 사법처리를 통하여 단죄되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상념을 떨어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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