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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8 12:26:27
  • 수정 2020-05-06 11: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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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당시의 계염군 [사진=김형석/ Why Times]


[도청 지하실의 폭약 해체사건]


5.18의 실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키워드는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발물 해체 사건이다. 애초부터 시위대가 시민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계엄군과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닷새 동안이나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은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이 폭발하면 광주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계엄군도 진압작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5월 22일 밤사이에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이 자진하여 총기를 반납하러왔다. 게다가 오후에는 전날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트럭도 도청으로 들어와서 내려놓는 바람에 마당에는 총기와 폭약이 아무렇게나 널렸는데 8톤 트럭 4대 분이나 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이 같은 모습을 현장에서 본 몇 명의 청년이 총기와 다이너마이트 등을 지하실 식당으로 옮긴 후에 안전한 관리를 위해 봉사를 자원했다. 이들은 군에서 공병하사관으로 복무하면서 수류탄공이 조작법,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도화선 점화법 등을 사병들에게 교육시킨 경험이 있던 김영복의 안내에 따라 무기별로 분류하고 정리해 놓았지만, 지하실의 공간이 협소하여 안전하게 관리하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무기고를 지키는 일에 자원한 사람은 9명이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남은 사람은 문용동(27)·김영복(26)·박선재(22)·정남균(21)·양홍범(20) 5명이고, 도중에 돌아간 사람은 이경식(23)·이혁(19)·정곤석(20)·강남열(?) 등 4명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폭약관리반원이라고 부르면서 연장자인 문용동을 중심으로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학생수습위원회와의 대외업무는 조선대생 이경식이, 경비 업무는 권투선수 양홍범이 담당하였다.


무기고를 관리하는 일은 무척 힘들고 위험했다. 도청 수비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총과 실탄을 달라고 협박하였고, 밤이 되면 총구를 가슴에 들이대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더욱이 다이너마이트에 뇌관과 손가락길이정도 도화선으로 장치한 수천 개의 폭약뭉치 곁에 수 백발의 수류탄이 공이가 결합된 채로 쌓여 있어서 사소한 부주의로 오발사고가 나거나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면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할 우려가 있어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지치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병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폭발사고를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는 김영복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복무한 문용동도 폭발물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 둘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23일 전교사를 방문하여 김기석 장군(부사령관)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 다이너마이트 뇌관 7백여 개를 넘겨주었고, 다음 날 이경식과 정남균이 동행한 2차면담 때 폭약뇌관 2천 여 개를 다시 넘겨주었다. 이것을 본 김기석은 현장 상황을 이해하고 탄약전문가를 파견해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24일 저녁 9시경부터 도청 지하실에는 전교사에서 파견된 배승일 탄약검사사와 문용동·김영복·정남균·이경식 5명이 촛불을 켜고 밤새워 폭약 해체작업을 수행하였고, 밖에는 양홍범이 출입문을 통제한 채 경비를 섰다. 지상에서는 도청 수비대가 총을 든 채로 순찰하고 있어서 발각이 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배승일은 밤을 새우며 철야작업으로 다이너마이트에 손가락길이정도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뭉치 2,100개와 세열수류탄 450여발의 공이 등을 분리함으로써 무사히 소임을 마치고 16시간 30분이 경과한 25일 오후 1시에 도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부대까지 걸어서 2시 30분경 복귀했는데, 배승일은 그때의 작업일지를 수첩에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그래서 나는 탄약관리반원 9명에 배승일을 더한 10명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라고 부른다.


만약 그날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을 해체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상황은 계엄군이 도청 진입을 통보한 가운데, 시민군을 지휘하던 상황실장 박남선과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하고 자폭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그들의 젊은 혈기와 행태를 감안하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았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서 화물열차에 싣고 있던 30여 톤의 폭발물이 폭발하면서 반경 500m이내의 건물이 파괴되고, 59명의 사망자와 115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배승일과 탄약관리반원들이 해체한 폭약 규모도 이리역 폭발사고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1980년 광주시 인구가 72만 명으로 익산의 2.5배인데다가 전남도청 주변의 밀집한 주거 환경을 감안할 때, “도청의 폭약이 폭발했더라면 이리역 폭발사고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피해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는 배승일의 증언은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으로 추정된다.


[배승일은 경계인인가, 이방인인가?]


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에서 주목할 사람이 군무원 배승일이다. 배승일은 1954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후에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마치고 ‘5급 을’ 군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1977년 7월 1일부로 전교사 소속 군무원으로 임용되었다. 그 후 1979년 6월 25일부터 군수지원단 병기근무대 광주분창에서 탄약검사사로 근무하던 중에, 1980년 5월 24일 최병주 병기근무대장으로부터 “전남도청에 가서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등을 분해하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배승일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둔 가장으로서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여 행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에게 전남도청으로 잠입하라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위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으나 명령에 불복하면 군사재판에 회부한다는 압박을 받고 한참을 고심했는데, 이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이리역 폭발사고 때 폭발물 처리반으로 참여하여 목격한 비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인 폭약이 폭발하면 광주 시내가 반파될 것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24일 저녁부터 다음 날 오후까지 17시간을 도청에 머무르면서 무사히 작업을 마치고 귀대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6월 25일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아, 국군 창건 이래 군무원으로는 최초의 무공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그런데 2006년 6월 1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자 행정자치부는 상무충정작전과 관련하여 훈장을 받은 68명의 서훈을 취소했고, 그 중에는 배승일도 포함이 되었다. 그러자 배승일은 서훈 취소자 68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자부 장관을 상대로‘서훈취소철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훈장을 서훈한 것은 5월 24일 전남도청에서 폭약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많은 시민의 생명을 구하였기 때문이지, 27일 새벽에 진행된 도청진압작전에 대한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요지였다. 주목할 사실은 이때 ‘5․18’관련단체들이 배승일의 명예회복에 뜻을 함께 모아 준 것이다. (사)5․18민주유공자유족회, (사)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재)5․18기념재단이 공동으로 작성한 탄원서는 폭약뇌관 분리작업의 필요성과 성과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배승일은 엄청난 폭약과 수류탄 및 최루탄 뇌관과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수천 명의 시민군과 광주시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였습니다. 전남도청 건물을 비롯하여 전남도내 일원의 건물 파괴 및 기밀 행정서류의 파괴를 막았으며 비록 배승일이 계엄군의 명을 받아 폭약을 제거하였지만 폭약의 뇌관과 신관을 제거하여 광주시민의 생명 및 재산 피해를 막았는바, 이는 국가 재산을 보호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승일은 1977년 11월 11일 밤 11시에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의 폭발물 처리반 요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경험을 통해 배승일은 폭발물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협을 무릅쓰면서 폭약의 뇌관과 신관을 제거하여 많은 피해를 줄였기 때문에, 배승일의 서훈을 취소하는 것은 합당치 않기에 이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결과 서울행정법원은 배승일이 행한 폭탄뇌관 분리작업을 상무충정작전과 별개 사건으로 판단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배승일의 ‘훈장서훈 취소건’뿐 아니라, 도청 지하실 폭탄해체에 관한 성격을 규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만약 폭탄해체작업이 계엄사 발표대로 충정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계엄사가 벌인 공작이었다면 훈장을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충정작전과 별개로 보고 정부의 ‘서훈 취소’를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신군부가 도청 지하실의 폭탄해체작업을 상무충정작전의 일환으로 내세우며 문용동을 프락치로 내몬 잘못된 사실을 사법부가 법적 잣대로 바로잡은 것이다. 법원 판결처럼 폭약관리반원들의 의로운 행위는 계엄군의 공작과 상관없는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배승일은 광주시민인 동시에 전교사에 근무하는 군무원이었다. 그런 그는 광주시민들과 군이 대치하자 경계에 선 경계인이었다. 게다가 군무원이라는 신분도 군과 민간인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경계인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5․18 단체들은 탄원서를 통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뿐 아니라 탄원서에는 1980년 5월 24일 생사를 건 수고로 광주를 안전하게 지켜준데 대한 보은의 의미도 포함되었다.


지금 배승일은 충북 영동에서 작은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는 군복무 중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심한 언어장애를 앓고 18년 만에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년 이상의 장기복무자들만 안장될 수 있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폭발물을 해체하여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 – 문용동 김영복 박선재 정남균 양홍범 이경식 이혁 정남곤 강남열 배승일은 5.18과 더불어 길이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과 관련하여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5.18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 일각에서 잘못 알려진 가짜 뉴스 때문이다. 논란이 된 것은 육사를 졸업한 영관장교 출신으로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유학해 시스템공학을 전공했다는 지만원 박사가 ​5.18이 사기극이라는 것을 가장 쉽게 입증하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보관된 폭탄의 해체자는 있는데 조립자가 없다. 이것이 북한군이 광주에 내려온 증거이다”라면서 이 사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하겠지만, 우선 전남도청 지하실 폭발물 사건과 관련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만원의 설명을 다시금 살펴보자.


“조립된 폭탄, 해체자는 있는데 조립자가 없다. 전남도청에 8톤 트럭분의 TNT를 운반해놓고 이를 2,100발의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다. 그런데 이 2,100발의 폭탄은 계엄사 소속 5급 문관 배승일이 21세의 전남대생 김창길 등의 도움을 받아 5월 25-26일에 걸쳐 피를 말려가면서 기술적으로 해체했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관장하는 계엄사령부에서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이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면 이 TNT는 광주 사람이 조립해 놓았는가 아니면 북한 특수군이 조립해 놓았는가? 광주시민이 80만 인구의 당시 광주를 날려 버리기 위해 이 위험한 폭탄을 조립했는가? 광주에는 이런 폭탄을 조립해서 5.18 유공자 된 사람 없다. 광주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말문이 막혀 있다. 2,100발의 TNT 폭탄 광주시민이 조립했는가.”


지만원의 설명에는 네 가지의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이 사건과 김창길은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문용동을 비롯한 5명의 탄약관리반원들의 존재를 몰랐던 데서 나온 추측이다. 둘째, 배승일이 선발된 것은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 탄약검사사 3명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젊어서 신분이 발각될 염려가 적었기 때문이었지, 그가 뛰어난 폭탄 해체 기술자라서가 아니었다. 셋째, 그날 배승일이 해체한 폭약뭉치는 산업용 다이너마이트지 군사용 TNT가 아니었다. 넷째, 광주에는 이런 폭탄 조립해서 5.18 유공자 된 사람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당시 육군고등군법회의 판결문을 보면 구체적인 사실과 명단이 확인된다. 그 명단은 임태남(30, 운전사), 이성전(39, 무직), 차영철(28, 광부), 김영봉(26, 광부), 박홍철(25, 광부), 김정곤(32, 광부), 김성진(23, 농업), 박태조(32, 농업), 배봉현(23, 노동), 김종삼(24, 목공), 오동찬(26, 버스개찰원), 천주열(25, 운전사), 이두영(25, 무직) 등 13명이다. 이들은 모두 화순광업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여 폭약뭉치로 조립한 혐의로 법적 처분을 받았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 공로로 5.18유공자가 되었다.


필자는 역사학자로서 5.18을 말한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처음 사용한 역사의 그리스어 히스토리아(Historia)의 의미는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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