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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9-23 13:08:31
  • 수정 2022-10-09 15: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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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편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대던 때가 있었다. 멀리서 따르 따르 따르 하고 빨간색 자전거가 마을로 접어들면 온 동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졌고 우리도 뛰어놀던 것조차 멈추고 집배원 아저씨에게로 달려갔다. 어디서 편지 올만한 데도 없는 어른들까지도 괜시리 자전거를 기다렸고 누구네에 누가 편지를 보냈나 더 궁금해 했었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오는 편지, 내게 오는 편지라도 있으면 무슨 소식일까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그걸 그 자리에서 뜯지 못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가기도 했었다. ‘우리 집에 누가 편지 보낼 사람이 있겄는가.’ 어떤 이는 안타까운 한숨만 내쉬기도 했다.


가장 정겨운 통신 수단, 특히 멀리 있는 이에게 보내는 소식은 편지보다 더 좋은 게 없었다. 글씨를 쓸 줄 모르면 동네의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구술을 하면 그것을 받아 적어주었었고, 답장이 왔는데도 글씨를 모르면 역시 글을 읽을 수 있는 누구에겐가 읽어달라고 하여 들으면서 눈물 콧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편지가 주는 감동은 문자적 소식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글자를 깨우쳐 편지를 보내온 것에 대한 대견함에서의 감격도 컸다. 부모를 떠나 객지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과 대견함도 있다. 그리고 다른 통신 수단이 없으니 소식을 모르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일순간에 해소시켜 주는 반가움과 고마움이 컸다. 거기다 부모를 그리는 자식의 애틋한 정과 떨어져 있어서 더욱 보고파지는 부모의 마음까지 합해졌다. 그렇게 정의 결정체인 한 통의 편지이니 그 감동과 감격이 어찌 크지 않으랴.


그런데 요즘은 보내면 몇 초도 안 되어 받아볼 수 있는 전자우편의 시대이다.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전화도 있고, 얼굴까지 보며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화상통화도 있다. 맘만 먹으면 몇 시간 내에 찾아가 만날 수 있게 교통수단도 좋아졌다. 그러나 한 통의 편지가 주는 정을 대신할 만큼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요즘도 편지를 즐겨 쓰는 편이다. 전화나 이 메일은 좀 건방진 것 같고 너무나 형식적인 것 같이 느껴진다. 특히 윗 어르신들께는 전혀 인사가 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버릇없다고 야단만 맞을 것 같다. 아랫사람에게도 기계글씨로는 내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지 않다.


1997년 한 해 45억 통이던 우편 물량이 2001년까지는 64억 통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 개인적 편지인 우편 편지는 점점 줄어들어 요즘은 1년에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편리를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이요 추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장의 종이 안에 담겨있는 친필 편지의 따스한 정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지난해 캐나다 심포지엄에 갔을 때다. 문득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이국 하늘 아래서 고국으로 보내는 편지, 편지를 보낸다고 해도 내가 편지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을 터인데도 편지를 쓰고 싶었다. 엽서를 사서 아내와 두 아이와 그리고 나, 모두 네 장의 엽서를 썼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앉아 고국의 그들을 향해 짧은 엽서를 쓰면서 나는 많이 행복했었다. 편지를 보낼 상대가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표를 못 사 부치지도 못하여 가져오고 말았지만 그걸 쓰는 동안에 나는 오랜만에 참 많이 행복했었다.


나는 수십 년간 해마다 5월이면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 번도 편지를 부치진 못했다. 보내는 사람은 있어도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 보낼 수도, 보낸다고 가주지도 않을 편지, 나는 그런 편지를 카네이션 대신으로 쓰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귀한 책을 보내오신 선배 문인께는 편지를 쓰고 있다. 감사한 마음, 축하하는 마음을 편지지에 담아 적으며 그 분을 생각한다. 그리고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기분, 우체통은 왜 빨간색일까. 언제부터 빨간색이었고, 왜 빨간색이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빨간 우체통이 주는 느낌은 편지를 쓰는 마음과 함께 내 안에 핏빛 따스함을 더해 준다.


편지를 쓰며 지난날을 생각한다. 한 장의 편지를 쓰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버리거나 찢어버린 편지지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는 말은 다반사였지 않던가.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편지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래보질 못 했다. 편지지에 단번에 쓰는 편지로 일관되곤 했다. 그래서 내가 편지에 어떤 내용을 썼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편지는 쓰는 그 때 그 순간의 내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것 아닌가. 고치고 다듬는 것보다 그렇게 마음 그대로가 온전히 보내지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우리 가족은 비교적 편지를 자주 쓰는 편이었다. 아내도, 큰 딸아이나 아들아이도 편지를 곧잘 썼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내 방문에 편지를 써서 붙여놓던 딸아이, 나보다 일찍 나가게 될 때는 아침 상 위에 편지를 써놓던 아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여자아이처럼 예쁘게 편지를 쓰던 아들아이, 나 또한 짧은 쪽지편지를 자주 썼다. 하지만 지금은 참으로 오래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들아이가 군에 가 있을 때 우리 부부가 보낸 편지를 아이는 제대하면서 그걸 파일에 넣어 갖고 왔었다. 거기에 우리 부부가 받았던 아들의 편지까지 넣은 두툼한 파일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직접 해도 될 말을 편지로 대신하는 것은 오히려 거리감을 주고 서운함도 줄 수 있지만 사랑의 표현을 편지로 남겨 놓으면 한결 기분이 좋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요 그 마음을 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세상은 참 많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금은 우편업무도 편지가 아닌 택배나 고지서 등 업무가 주란다.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사던 때가 그리워지고 있다. 연필로 쓸까, 볼펜으로 쓸까, 만년필로 쓸까 고민도 했었는데 어느새 나도 카톡이나 문자가 먼저 앞서고 있다.


하지만 어쩌다 편지를 받게 될 때의 기쁨은 오히려 배가 된다. 그런 기쁨을 위해 나도 가끔은 편지를 쓰지만 우선 우표를 붙이고 우체국에 가거나 우체통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편이 자꾸만 마음을 막아버린다. 우체통을 찾기도 쉽지 않고 우표를 파는 곳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펼쳐보면 사연과 함께 글씨를 써 내려가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고 생각나는 편지이기에 나는 억지로라도 편지를 쓰려고 한다.


내가 편지를 쓰지 않으면 편지가 영영 사라지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기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다. 글을 쓰는 작가지만 사실 편지만큼 따뜻한 글이 세상에 또 있을까.


오랜만에 만년필도 꺼내어 유일하게 남은 내 어머니의 끈인 이모님께 편지를 써야겠다. 그래 다시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도 일어나게 하고 싶다. 글씨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도 떨쳐버리게.
돋보기를 꺼내 내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이모님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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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현 칼럼니스트 최원현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월간 한국수필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6권,《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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