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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16 10: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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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金正恩)을 향한 문재인씨의 연설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사진은 지난 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는 문 대통령 [사진=뉴시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金正恩)을 향한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文在寅) 씨의 병신스럽기 짝이 없는 구애(求愛)의 ‘세레나데’는 8월15일 천안 유관순 기념관에서 있었던 ‘8.15 경축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짜증나는 정도가 아니라 분노(憤怒)를 금하기 어렵다. 그는 “평화와 통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운위한다. 그러나,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과의 ‘평화’가 어떠한 것인지를 그는 과연 모르는 것인가? 모른다면, 그는 결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부적격자이고, 만약 안다면, 그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경계해야 할 범죄형 인물이다.


북한과의 ‘평화’라는 것은 우선 ‘공산주의자들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고, 특히 우리의 경우는 통상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완전히 현대판 ‘걸(桀)’이나 ‘주(紂)’에 해당하는 폭군(暴君)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폭군이 문재인 씨에게 ‘한반도 평화’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그가 말하는 ‘평화’의 ‘조건’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동안 70년 동안 북한 땅에서 펼쳐져 온 ‘동물농장’의 비참한 삶을 수용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도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씨는 그 같은 북한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대한민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장에서 북한과의 ‘평화’는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와 받아들일 수 없는 평화가 엄연히 따로 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는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오늘의 (아니, 정확하게는, 어제까지의) 번영과 풍요 그리고 자유와 권리를 훼손하지 않을 뿐 아니라 2천5백만 북한 동포들도 우리가 그 동안 누렸던 번영과 풍요 그리고 자유와 권리에서 배제되지 않는 내용이 보장될 때라야 가능해 지는 것임을 문재인 씨는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아니 하고, 북한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동안 이룩한 발전의 내용을 훼손시키거나 북한 동포들의 노예 생활을 수용하는 내용의 ‘평화’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재인 씨가 말하는 ‘평화경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남북한의 오늘의 경제력 격차는 45 대 1의 편차를 보이고 있다. 복잡하게 여러 가지 수치를 가지고 논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세계적으로 10위권인 반면 북한의 ‘경쟁력’은 세계 200여개 국 가운데 바닥을 기고 있다. 이 둘을 섞으면 그 ‘경쟁력’은 어찌 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남과 북의 역량을 합친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될 것인가? 이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그 대한민국의 전도(前途)는 어찌 될 것인가를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8.15 해방 74주년이자 대한민국 독립 71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중(雨中)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운집(雲集)하여 서울 도심 세종로의 세종대왕 동상으로부터 서울 역까지의 대로를 가득 메운 ‘태극기 시위’ 참가 애국시민들이 “문재인 즉각 하야(下野)”를 목청껏 외치는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공생(共生)”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백일몽(白日夢)인가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그의 회고록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장황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문재인 씨의 지적(知的) 수준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문재인 씨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남북관계와 통일 문제를 다루려 한다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은 몰라도 ‘동물농장’ 정도는 일독(一讀)을 했어야 하고 그보다도 ‘백범일지’를 한 번 읽어 봄으로써 한 세기 전에 있었던 백범의 체험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필자는 범우사가 2002년에 중간(重刊)한 ‘백범일지’ 가운데 백범이 임시정부 시절에 겪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일화(逸話) 부분을 여기에 발췌한다. 모쪼록 문재인 씨가 ‘백범일지’를 통째로 읽어 보던지 아니면 여기에 발췌하는 부분을 읽어 보고 그의 대북정책에 이를 참고하기를 간곡하게 권고한다. ‘백범일지’의 여기에 발췌하는 부분은, 문재인 씨뿐 아니라, 요즘 ‘종북∙주사파’로 “주화입마(走火入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이 나라 젊은이들도 반드시 읽어 보고 그들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는 계기기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李東馥]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서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重生疊出)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만,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우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 산보 가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호칭)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의 독자적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에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니는 것은 대(大)불가이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돌아갔다.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했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서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체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Vladimir Lenin)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고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라고 반문함으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재 민족의 일은 제 민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난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서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손에 받으려 했으나 김립은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자금이라고 칭하면서 20만 루블을 더 받아가지고 몰래 상해로 돌아와서 공산당 무리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본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ML당파였다.  ML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했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도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와 천진 등지에더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루믈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중국, 조선, 아령(俄領) 각저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정부는 그대로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아무리 싸워도 귀일(歸一)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에 출품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돌아보지도 아니 함으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끼리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함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幕)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을 횡령한 김립은 오면진,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在中國) 청년동맹, 주중국(住中國)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라”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 내려 온 것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민족독립운동가로 표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는 일이 생겼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음으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단체가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분이요. 속은 그대로여서 민족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들을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 함으로 자기네가 선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조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들이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도 동포들이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자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으로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바꾸어서 아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附)∙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남군정서(南軍政署)∙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 들어가서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相剋)을 시켜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 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데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작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韓人)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씩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서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 하다. 이러한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위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활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229∼236쪽]


“이때에 대일전선(對日戰線) 통일동맹(統一同盟)이라는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秦淮)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렇게 한 이불 속에서만 딴 꿈을 꾸려는 (同床異夢)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 소위 5당(黨)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서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되어서 나왔다.  이 통일운동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서  임시정부의 해체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송병조(宋秉祚)∙차이석∙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悅)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송병조 두 사람을 내놓고 그 외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고 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杭州)로 가서 차이석∙송병조 양씨에게 5당이 통일된 이날자로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송광조∙치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이러한 사정을 전하였음으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나는 이시영(李始榮)∙조완구∙김붕준(金朋濬)∙양소벽(楊小碧)∙송병조∙차이석 제씨와 함께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嘉興)으로 가서 거기에 있던 이동녕(李東寧)∙안공근(安恭根)∙안경근∙엄항섭(嚴恒燮) 등을 가하여 남호(南湖)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湖上)에 떠서 선중(船中)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조완구와 김구였다.  이에 송병조∙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264∼265쪽]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抗戰)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당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假面)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266∼267쪽]


“내가 중경(重慶)에 와서 할 일은 세 가지였었다..... 셋째로는 장사(長沙)에서부터 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합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수 김약산(金若山)은 계림(桂林)에 있었으나 윤기섭∙성주식∙김홍서∙석 정∙김두봉∙최석순∙김상덕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 당을 만들 것을 제의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지만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의 연명(連名)으로 민족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에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친 당으로 조직하는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다른 자와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지 1개월 만에 비로서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주의 정당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7개 정당이 참가하는 7당 통일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면서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조의 협정에 5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합이 성공하였음으로 며칠을 쉬고 있는데 이미 해산했어야 할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 탈퇴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고 있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 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 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遠東)에 있는 3당 만으로 한국통일당이라는 이름의 통일정당을 새로이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하와이 애국단체와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체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결국 5당 통일은 된 셈이 되었다.“ [278∼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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