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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5 07: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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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조선땅에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란 유령이 나타났다
-모든 민주주의는 당연히 숙의민주주의이며, 숙의민주주의가 아니면 그것은 바로 독재
-숙의의 결과를 다수결로 결정… 숙의와 다수결은 민주주의에서는 본질상으로 같은 말


2017년 10월 조선땅에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란 이상한 유령이 나타났다. 그 동안의 민주주의가 숙의를 하지 않는 민주주의였다면 이 민주주의는 숙의를 하는 민주주의란다.

 

민주주의만 40년 가까이를 공부해온 나로서는 이런 개념이 실로 듣보잡인데, 사람마다 답하기를 그런 민주주의가 있단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께서 새 원전 건설의 진행 여부를 공론화에 부쳐 그 판단을 따른 것이 숙의민주주의의 대표적 실현 형태라고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적지 않다.

 

지난 날에는 무슨 존재하지도 않는 ‘협치민주주의(governance)’라는 유령이 세간을 떠돌더니 새 시대에는 이 숙의민주주의란 유령이 자리를 대신해 혹세무민을 할 참인가 보다. 혹세무민의 그 가지가지의 유령들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 능력과 기술이 놀랍다.



▲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는 대표를 의미하며, 국회만을 전제로 한 개념은 아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국민주권 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를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이 아닌 곳에 위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군주주권 하에서 군주가 국민을 위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위민정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며, 설령 국민주권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의사에 따르지 않는 국가운영은 독재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헌법 제1조 제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 것은 공화 즉 군주정을 부인함을 전제로 국민주권이며 민주주의일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을 전제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라고 할 때, 그러한 민주주의는 다시 국민의 구체적 의사에 따르느냐 추상적 의사에 따르느냐를 가지고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로 나뉜다. 직접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 모두 국가기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모두 형식상으로는 ‘간접’ 민주주의이므로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적어도 학문적으로 옳지 않다. 한편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는 대표(representation)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합의제기관인 국회만을 전제로 한 개념은 아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면 대통령도 대의기관인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국민의 구체적인 의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발안⋅국민표결⋅국민소환이라는 제도가 필요하다. 즉, 국민이 스스로 안건을 제출할 수 있게 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그 결정된 의사를 국가기관이 따르지 않을 때는 즉시 소환하여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본질은 국가기관이 국민의 의사결정 특히 공약에 기속을 받는다는 데 있다.

 

반면, 대의민주주의는 대의기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사결정권 자체를 위임받아 국민의 추상적 의사를 알아서 추론하여 결정하는 원리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은 국가기관이 국민의 의사에 기속 받지 않고 재량껏 의사를 결정하며, 그에 대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서 의사의 결정 과정 = 숙의 + 다수결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의사결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그 의사결정은 당연히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데 반대 의견은 찾기 힘들다. 이 대화와 타협을 우리는 달리 ‘숙의(deliber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이든 대의민주주의이든 모든 민주주의는 당연히 숙의민주주의인 것이며, 숙의민주주의가 아니면 그것은 바로 독재이다. 숙의가 아닌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숙의민주주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여기서의 숙의를 특히 행정학 쪽에서는 달리 ‘협치(govern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협치 역시 민주주의 또는 적법절차를 달리 부르는 말이지, 따로 존재하는 국가운영방식인 것은 아니다.

 

한편, 숙의를 통하여 다행히 안건에 대해 주권자의 의사가 만장일치에 이르면 더 없이 좋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의 의사 결정을 해야만 한다고 할 때 그 의사결정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하는가? 바로 그 답으로 나온 것이 차선책으로서의 다수결원리이다. 결국 민주국가에서의 의사결정은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다수결로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 때의 다수결원리는 소수보호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숙의민주주의가 전통적 민주주의와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며 다수결원리를 반대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숙의의 결과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숙의와 다수결은 적어도 민주주의에서는 본질상으로는 같은 말이다. 동전의 앞뒤인 것이다.

 

숙의민주주의란 없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가 아니면 독재인 것이지, 종래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숙의민주의나 협치민주주의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숙의나 협치를 추구하지만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하면 결국은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지는 Joseph M. Bessette도 그의 저서 에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숙의민주주의란 것이 따로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신규 원전 건설의 중단 여부와 관련하여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국민들의 직접적인 의사를 듣고 원전 건설을 진행하는 쪽으로 결정하였다는 것을 놓고 그것이 숙의민주주의이며, 이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고자 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훌륭하단다.

 

그러나 이는 숙의민주주의 개념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성립한다. 그리고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문재인 대통령의 당해 정책 결정에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전의 포기를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고 스스로 직접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이면 선거를 통해 이미 확인된 원전 폐기의 공약을 따랐어야 했다. 공론화위원회의 여론 수렴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비된 선거제도를 통해 표출된 주권자의 의지를 따르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며, 주권자를 개⋅돼지로 보겠다는 것이며 또 다른 국정농단일 뿐이다.

 

우리가 오늘 숙의민주주의의 개념을 되짚어 보는 것은 바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제 하에서 대통령이 주권자의 의사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음은 얼마든지 용납된다. 그러나 주권자를 개나 돼지로 보며 농락하려 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에 대해 헌법은 제65조에 탄핵제도를 두어 경고하고 있다.

 

그 점을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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