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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4 20:49:37
  • 수정 2022-10-09 15: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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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사진=Why Times DB]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5년 만에 31명의 동기동창들이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돌며 환상여행을 했다. 따가운 햇살 속에 올리브나무와 해바라기가 도열한 벌판과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열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60대 초로의 여인들은 10대의 소녀로 돌아가서 마음껏 웃으며 속삭였다.


7시간 뒤로 물러난 시차가 자연스럽게 45년 세월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문과에서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거의 반세기가 흘러도 갈래머리를 한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과와 예능계였던 친구들은 거의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낯선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공간에서 배우며 자랐던 추억을 두레박질 하며 선생님에 대해 공통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아는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며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열흘을 동행하며 친구들의 독특한 개성과 두드러진 취향을 발견했다. 나이를 뛰어넘는 미모와 건강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난 멋쟁이 친구들, 사진 찍기를 즐기며 틈틈이 쇼핑을 즐기는 활달한 친구들, 짧은 저녁시간에도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건강미용인들, 미리 공부를 하고 와서 지도를 들고 자유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학구파 겸 모험가, 혼자 있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말없이 여정을 즐기거나 밤에 잠을 잘 못 이루는 친구들도 있었다.


육식 위주의 스페인 음식이 맞지 않아 채식 위주의 식사를 찾는 한식 애호가, 조용히 다가와 관심을 보이며 깊이 있는 몇 마디 말로 관심을 표하는 사려 깊은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 외국에 살면서 여행에 합류한 재미교포 동창이 다섯 명이나 된다.


친구 30인 30색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열흘은 스페인의 켜켜이 축적되고 융합된 문화와 역사, 종교와 예술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그녀들이 보이는 관심사와 매일 바뀌는 패션, 허물없이 주고받는 말과 행동,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행단을 통솔하는 리더십,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갖가지 변수에 대처하고 섬세하게 살피며 헌신하는 속사람을 보았다.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여행기간 중에 단 한 번의 지각이나 사건사고도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긴 세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전문가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거나 현직에 있는 친구도 여러 명 있어서일까, 반듯하지만 매우 특이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 교사, 의사, 약사, 공직자, 연구원, 사업가의 비율이 높았고, 남편과 평균 두 명의 자녀, 하나 이상의 손자 손녀를 두고 양가 부모 중 한 분 이상을 부양하거나, 조카만으로 족한 독신도 있었다. 같은 연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중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을 겪으며 살아온 전후 베이비부머의 선두주자들로서 여전히 인생이모작을 해내며 인생곡선 백두대간을 넘는 중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 못할 일이 없다. 젊고 날씬한 몸매는 아니지만 수영을 하고나서 마야와 같은 자세로 선베드에 누운 여인들이 사랑스러웠고, 합창단과 보컬밴드로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선창을 하여 하모니를 이루며 노래하는 모습이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정겨웠다.


모두가 60년 이상 세월과 사귀거나 엎치락뒤치락 견디며 살아왔기에 엘그레코가 그린 붉은 옷을 입은 예수와 고야가 그린 흰옷의 예수를 보며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각의 걸작이 탄생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고,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에서 알함브라의 사이프러스 숲을 볼 수 있었으며, 마요르카 섬의 수도원에 유했던 쇼팽의 방에서 그의 흔적과 기침소리를 아련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무슬림이 서로 싸우며 녹아든 역사, 사랑하고 미워하며 원한이 맺힌 천년의 이야기도 가슴으로 알아들었다. 무어인들이 만든 무한반복 각양각색의 문양과 정교하게 세공된 대성당의 보물 속에 넘치는 눈물과 희생, 믿을 수 없는 믿음의 크기와 탄식소리를 보고 들었기에 플라멩코의 격렬한 춤과 노래에 녹아있는 슬픔과 유장한 시간의 물결이 마음을 뒤흔들었고 단 한 순간도 그 몸짓과 목소리를 놓칠 수 없었다.


세비야의 플라멩코 극장에서 샹그리아를 마시며 보낸 밤은 맑은 달빛 속에서 파랗게 깊어갔다. 여행을 시작하고 5일째 되는 날로 단박에 스페인에 매료되었다.


철컥대는 나무열차를 타고 황금의 계곡 소예르에 들어가며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와 레몬이 손에 닿을 듯 창밖으로 팔을 내밀고, 기타의 선율을 들으며 알함브라의 물보라 숲길을 내려오던 순간은 고성호텔인 파라도르 드 톨레도에서 내려다보는 황금빛 야경으로 이어지며 꿈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다. 그 꿈을 기름 삼아 생명의 심지를 돋우며 건강하게 살다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45년 만의 수학여행 사진들을 다시 꺼내보는데 어느새 새벽 창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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