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05-24 11:27:05
기사수정

▲ 1876년(고종 13) 2월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 [Why Times DB]


[강화도에 나타난 일본의 전권대신과 이노우에 가오루]


 운양호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초 일본에서는 군함 6척과 300명의 군사가 딸린 전권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특명전권대신에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부대신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수행원에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이었다. 


 이들 모두 근대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지만, 조선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인물은 이노우에이다. 그는 초슈(長州藩, 현재의 야마구치현 지역) 출신으로 일본에서 서양 배우기 열풍이 한창이던 1863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에 유학한 최초의 일본 유학생 5인 중 1인이다.


그는 이토와 함께 국제법과 의회제도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장차 일본의 정치제도를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가 등을 고민하였다. 이런 그들의 경험이 명치유신과 함께 일본의 천황제 확립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후일 청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에 기울자 그는 조선 공사로 부임하여 조선보호국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삼국간섭 이후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자 조선에서 ‘박영효반역음모’와 ‘명성황후시해’ 사건을 촉발시키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을 상대한 조선 측 접견대관은 신헌(申櫶), 부관은 윤자승(尹滋承)이었다. 장소는 강화도 연무당(鍊武堂), 먼저 일본의 전권 수행원 모리야마와 조선의 부관 윤자승 사이에 예비접촉을 하였다. 이때의 분위기는 다음의 대화에 잘 엿보인다.


모리야마: 이번에 올 병졸이 4,000명인데 수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400명만 데리고 왔다.


윤자승: 400명의 병졸도 적은 것이 아니다. 넓은 관사가 없으니 수를 줄이는 것이 좋겠다.


모리야마: 대신의 행차에는 예의가 있는 것이니 400명에서 더 감할 수는 없다. 뒤이어 올 병졸 2,000명에 대하여도 인천, 부평 등지에 거처할 곳을 마련함이 좋겠다.


윤자승: 이번의 양국대신 접견은 옛 우호 관계를 계속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하여 많은 병졸이 필요한가. 왜관 설치에 관한 옛 약조에서도 초량(草梁)에 설치한 문 밖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인천, 부평 등지에 상륙하게 한다 함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모리야마는 조선 측의 기선 제압을 위해 군사력을 배경으로 협박, 기만하는 형국이었다. 


[운양호 사건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 측의 설전]


예비접촉에 이어 1872년 2월 11일(양),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제1차 본회담이 열렸다. 실록에이때의 교섭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중 운양호사건을 둘러싼 양측의 날선 주장 중 일부는 이러하다.


구로다: 우리 배 운양함(雲楊艦)이 작년에 우장(牛莊)으로 가는 길에 귀국(貴國)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귀국 사람들이 포격을 하였으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정의(情誼)가 있는 것입니까?


신 헌: 남의 나라 경내에 들어갈 때 금지 사항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도 씌어 있는데, 작년 가을에 왔던 배는 애초에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로 간다는 것을 먼저 통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 구역으로 들어왔으니,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포를 쏜 것도 부득이 한 일입니다.


구로다: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달아서 우리나라의 배라는 것을 표시하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


신 헌: 그때 배에 달았던 깃발은 바로 누런색 깃발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배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귀국의 깃발이었다고 하더라도 방어하는 군사는 혹 모를 수도 있습니다.


구로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깃발의 표시는 무슨 색이라는 것을 벌써 알렸는데 무엇 때문에 연해의 각지에 관문(關文)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신 헌: 여러 가지 문제를 아직 토의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미처 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영종진(永宗鎭)의 군사 주둔지를 몽땅 태워버리고 군물(軍物)까지 약탈해간 것은 아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득실에 대해서는 아마 양쪽이 양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먼저 동래(東萊)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한 예의로 접대하는 것이니 또한 양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류해 온 배에 대해서까지 먼 지방 사람을 잘 대우해주는 뜻으로 정성껏 대우하여 주는데 어찌 귀국의 군함을 마구 쏘겠습니까?(중략)


구로다: 이제 운양함이 우리 배라는 것을 알았으니 옳고 그른 것이 어느 쪽에 있으며, 그 때에 포격을 한 변경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신 헌: 이것은 알면서 고의적으로 포를 사격한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구로다는 운양호에 단 일본국기를 모독했다 하여 조선 측을 몰아세웠다.  구로다는 운양호가 청국의 우장(牛莊)으로 항해하는 도중(?) 우연히 강화도에 진입한 것이라면서, 운양호에 일장기가 걸려 있음에도 포격한 것은 일본의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 하였다.


신헌은 비록 그 깃발이 일본국기라 하더라도 해상관문을 지키는 군사가 이를 어찌 알고 있겠는가라고 응수하였다. 나아가 일본의 무단 접근과 포격, 영종진 약탈 등을 예로 들며 일본의 무력 행동은 이웃 국가간의 의리가 아니라고 꿋꿋이 대응하였다.  


  구로다는 국기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는 한편, 조선도 속히 국기를 제정할 것과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사이 강화만의 일본함대에서는 시시로 대포를 쏘아 조선 측 접견대관을 놀라게 하였다. 간접적인 무력 시위이자 협박이었다. 1853년 페리제독이 일본을 원정했을 때 에도(江戶)만에 함대를 진입시켜 해상시위를 하는 가운데 미일화친조약, 즉 가나가와 조약(神奈川條約, 1854)을 체결할 당시와 유사한 방법이었다.


[조선 측의 결론-일단 일본과 강화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과 강화를 하느냐 여부를 놓고 의론이 분분하였다. 김병학, 홍순목 등 대부분의 대신들은 반대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강화를 하자는 이가 있었으니,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1807-1877)였다. 


  그의 주장은 삼천리강토가 안팎으로 대비를 다 했던들,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이 이처럼 감히 조선을 엿보고 공갈과 협박을 자행할 수 있었겠는가, 분하고 원통하지만 오늘날의 조선 군대로는 일본세력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일단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상과 같은 박규수의 주장은 고종의 의향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조선이 청국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장차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청국은 조선의 사태에 대해 책임질 수도 없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당시 청국은 마가리(Margary) 피살 사건(1875.2.21)으로 영국과 단교 중이었고, 서북부 중앙아시아 지역에 좌종당(左宗棠)의 원정군 파견을 준비 중이었다. 청국은 조선에서 외부세력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남하하는 러시아를 고려할 때 조선과 일본이 조약을 맺는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책이라고 보고, 귿이 이를 저지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에게 일본과의 수교를 권하는 입장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강화 쪽으로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마침내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조선의 대표(신헌과 윤자승)와 일본의 대표(구로다와 이노우에) 사이에  조일수호조약 (1876.2.21: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의 골자와 그 의미]


  이 약조에서 양국은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서두에 밝히고 12개조로 내용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위 조약에 근거하여 수호조규부록(修好條規附錄)과 무역규칙(貿易規則)을 맺었다.


  이중 조일수호조규 제1조는 ‘조선국은 자주국(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되어 있다. 여타의 조항은 2개항의 개항(원산은 1879.8.28, 인천은 1881.2.28 개항협정 체결), 사절의 파견 및 일본인의 개항장 왕래와 통상허가, 땅의 임차와 가옥 건축, 일본의 조선해안 측량, 영사의 파견과 재판권 등이다. 


  이후 맺어진 수호조규부록에서는 개항장 10리 이내의 일본인 자유 여행과 일본화폐 유통의 허가가 결정되었고, 무역규칙에서는 아편무역의 금지, 일본 상선에 대한 세금 부과 및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모든 선박’에 대한 항세(港稅) 면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래되는 물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즉 수출입품에 대해서는 관세 규정이 없었다. 수출입품목에 대산 관세 부과는 7년 뒤 1883년에 가서야 양측의 지리한 협상 끝에 해결되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최초로 체결한 근대적 조약으로 주장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과 조선 양국이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여 조약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청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관계를 모를 리 없는 일본 측은 이 조항을 전략적 입장에서 넣었다. 한편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자주국’ 명칭에 대한 내면의 반가움도 있었을 것이지만, 청국의 입장을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듯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일본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청국과 마찰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에 1875년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공사를 청국에 파견하여 운양호사건에 대해 조선의 종주국인 청국에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를 넌지시 추궁하였다. 더불어 조선에 대해 청국이 갖고 있는 종주권(宗主權)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청국 대표 심계분(沈桂芬)은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기는 하지만, 내치(內治)와 외교는 자주에 맡겨 왔다’고 하여 운양호사건에 대한 청국의 책임을 회피하는 답변을 하였다. 이에 모리는 그렇다면 조선은 독립국이며 속방이란 허명(虛名)이라고 논박하였다. 요컨대 조선은 독자적으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며 청국이 이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 상황에서 조선 측은 별다른 부담 없이 조약 체결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일본의 위협이 가해지는 가운데 체결되었고, 조약의 일방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자율적 개항이냐, 강제적 개항이냐 등을 놓고 여러 주장이 교차되어 왔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문호개방을 하여 세계의 조류에 편입해 들어가는 단초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근대화의 첫걸음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강화도조약’이 ‘조규’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인가]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통상과 외교에 관한 약조는 흔히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라 불려왔다. 그러나 한문과 일문의 조약 원문에는 조약이 아니라 조규로 쓰여져 있다. 즉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혹은 ‘일선수호조규’(日鮮修好條規)로 되어 있다.


  과거 중등, 고등 역사교과서와 일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 등을 즐겨 썼으나 근래에는 조약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조일수호조규’를 공식 용어로, ‘강화도조약’ 과 ‘병자수호조약’을 별칭 정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약과 조규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서양식 실용적 사고로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양의 국제질서 관념을 놓고 보면 형식상 차이가 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500년 역사 속에서 근 20회의 통신사 왕래가 있었다. 그러나 1811년 이후로는 서양 세력의 진출이라는 국제 환경의 변화, 일본과 조선의 사정 변화 등으로 교류가 단절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과 일본 모두 이 약조를 과거에 있었던 통신사절을 통한 교류, 즉 예전의 우호 관계 복구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교섭 과정에서 일본의 구로다와 조선의 신헌 모두 그 점을 언급하고 있고, 조약 원문에도 그 점을 명시하고 있다. 조정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고종도 누차 옛 우호 관계의 복구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후로도 고종은 조선이 맺은 외국과의 최초 조약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이라고 거듭 강조한 바가 있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과 맺은 약조는 분명 ‘조규’(條規)로 되어 있지만, 서양 여러 나라와 맺은 약조는 모두 ‘조약’(條約)으로 되어 있다. 1880년대에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맺은 조약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청국에 조공을 하던 조선의 입지, 그리고 조선과 청국의 종주관계를 아직은 정면으로 배제할 수 없는 일본의 입장이 있었다. 요약하면 동양적 국제질서에서 서구의 국제질서로 가는 과정에 등장한 용어로 해석된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고종실록.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한국사연구회 편, 『한국사의 국제환경과 민족문화』, 한국사연구회, 2003. 金旼奎, 「近代 동아시아 國際秩序의 變容과 淸日修好條規」, 『大東文化硏究』41, 2002.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3972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최신 기사더보기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