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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18 17: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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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때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 걸고 싸웠던 수자기 430cm*413cm 크기이다.


[돌아온 광성보의 수자기]


한국근대사 관련 사진 자료집을 대하다 보면, 파괴된 진지 위에 성조기(星條旗)와 함께 열을 지어 선 미국 해군의 사진을 보게 된다. 성조기란 미국의 여러 주를 상징하는 만큼의 별이 여러 줄로 장식된 문양을 한 깃발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함상에서 수(帥)란 글자가 쓰인 대형 깃발, 즉 수자기(帥字旗)과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星條旗) 사이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미 해군의 사진도 보인다. 이 모두 신미양요 때의 사진이다. 파괴된 진지는 강화도의 광성보이다.


수자기는 조선군 지휘관 사령부에 두는 것이니, 일종의‘대장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에서도 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던 때에도 조선군 진영에 걸려 있었다. 사진에 찍힌 수자기는 근 140년간 미국 메릴랜드의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는 한국인 마다 숙연해 하며, 불법 약탈품이라고 주장하곤 하니, 미해군박물관 측으로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방문객들이 볼 수 있는 전시장에서 다시 유물 창고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 신미양요 직후 미해군 기함 콜로라도함에 게양된 수자기


필자도 1991년 워싱턴을 잠깐 방문한 기회에 그곳을 들러 본적이 있다. 안내해 주신 사학자 방선주 박사님과 그곳을 방문한 국사편찬위원회 측 일행과 함께 고이 접어 둔 수자기를 들여다보며“이것을 돌려받을 묘안은 없을까?’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그곳을 방문한 한국인 모두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근대 한미관계사의 개척자인 원로사학자 김원모 선생께서도 늘 그런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이런 여론이 두루 형성되면서 결국 그 수자기는 관계 당국의 교섭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과정은 이렇게 전한다. 


문화재청에서 2007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내용인 즉,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강화도에서 노획해 간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 즉 ‘수자기(帥字旗)’를 반환받는 데 조언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곳 박물관 측의 답변은 당연히‘불가’였다. 박물관의 유물 보존에 관한 각종 미국의 법령(대통령 명령과 의회 입법 등) 때문에 돌려줄 수 없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수자기와 같은 운명을 안고 있는 미국 소장의 깃발은 250여 점, 이 모두 세계 각지에서 온 것이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문화재청은 장기대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냈고, 박물관 측은 내부 검토를 거쳐 10년간의 장기 대여를 결정하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하여 수자기는 1871년 미군이 가져간 이후 처음으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서로의 입장과 자존심, 체면을 존중해 주면서 문화유산의 반환에 대해 어느 정도 합리적인 타결을 본 선례라 여겨진다. 이 수자기는 현재 강화전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참고로 수자기는 장수의‘수(帥)’자가 대형의 천 한가운데 적혀 있는 깃발이다. 수자기는 군사의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 즉 사령부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다룬‘수군조련도(水軍調練圖)’등에도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수자기가 보인다. 색조가 이렇게 다른 것은 아마도 넓은 바다에서 눈에 잘 띄는 빛깔을 택한 결과로 보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당시에도 이 수자기를 내걸고 진법 훈련을 했다고 전한다.


수자기는 장군기 역할 뿐만이 아니라,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신호기로서 기능을 했다. 전투 현장에서 조선군은 깃발과 신호로 명을 전달했다. 그러므로 수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 군대를 잃는 것으로 여기는 것,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근대 일본에서도 서남전쟁 당시 목숨보다 소중한 군기를 잃은 지휘관이 할복하려다‘내가 죽거든 죽으라.’는 천황의 말을 따라 천황이 죽자 할복의식을 한 인물이야기가 유명하다. 러일전쟁 당시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로부터 무지막지한 돌격전으로 일본군을 턱없이 많이 희생시킨다 하여‘빠가야로’소리를 들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육군대장 이야기이다. 


미군은 신미양요 때 광성보를 수비하던 조선군을 전원 물리친 다음에야 이 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한 명까지 조선군은 이 수자기 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항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자기를 반환하면서 해군에 의한 의식이 제주 남쪽 앞바다에서 열렸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11개국 39척의 함정이 수자기를 단 해군함정을 중심으로 해상 사열을 하였다. 적대에서 동맹국으로 전환한 한미 관계의 한 단면이자, 돛단배 해군을 유지했던 조선으로부터 최신예 전함을 갖춘 대한민국 사이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후예의 뿌듯한 사열 장면이기도 할 것이다.


▲ 전북 여산의 척화비. 척화비는 비문이 선명하다. 서체는 해서체(楷書)이며, 크기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通碑)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전라북도]


[조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다]


광성보를 점령한 로저스는 다음날 본 함대로 돌아갔다. 거기서 조선 정부의 항복 선언과 같은 회신을 기다렸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명의로 돌아 온 회신은 미국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로우공사는 이를 반박하고,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내는 공문을 전하라 하였지만, 조선의 관리 이기조는 그런 문서를 전달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거부하였다.


로저스로서는 당시의 병력으로 조선 전체를 상대로 군사 행동을 할 상황이 못 되었다. 미국 정부의 훈령 밖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더 이상의 작전을 행하지 못하고 20여일 뒤인 5월 16일(7월 3일) 철수하였다. 조선의 대외적 배척 감정만 고조시킨 채 소득 없이 미국함대는 떠나갔다.


이후 병력, 재력이 풍부한 미국은 제2의 원정을 단행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경에는 막강한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조선에서 패하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예나 이제나 늘 떠도는‘유언비어’는 실상과 멀지만 흥미를 유발하는 특징이 있다.


연구자들은 신미양요는 정복하고 지배해서 영토를 분할하거나 식민지화를 하기 위한 침략 전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포함외교에 의해 조선 당국자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조선의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던 점에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신미양요는 구애를 하다가 퇴짜를 맞은 실패작이라고도 한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등에서 포함외교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조선에서는 최초로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미국의 승리는 승리였으나 자랑하고 싶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무의미한 승리였다고 평한다.


한편 싸움에서는 압도적인 미국 측의 승리였음에도, 흥선대원군은 조선군의 희생을 과소 평가하였다. 한 수 더 떠서 흥선대원군은 미군이 달아났다고 기고만장하였다. 앞서 어재연의 전사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로저스가 기대한 항복 선언이나 이제 그만했으면 됐으니, 서로 잘해 보자는 식의 화해와 문호개방은커녕, 백성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 앙양, 내부 결속 강화와 함께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문호폐쇄정책을 강화하였다. 다시 전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전열을 정비하였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자손 만대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그러니까  주화(主和)는 매국(賣國)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면 역적이라는 뜻이었다. 화(和)를 논하는 자는 매국죄로 다스리겠다는 교서와 함께 쇄국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를 재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였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요컨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거기서 나온 배외의식과 강력한 저항은 내부적으로는 승리한 듯 선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봉책이었다. 쇄국의 둑은 어쩔 수 없이 무너질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원모,『근대한미교섭사』, 홍성사, 1979 이성무, 『조선왕조사』2, 동방미디어, 1998. 국제역사학회의 한국위원회, 『한미수교100년사』, 1982. 송영규, [만파식적] 수자기(帥字旗), 『서울경제』, 20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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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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