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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9-17 22:40:37
  • 수정 2018-09-18 22: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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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왕후 조씨 [WT DB]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여성이 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가 그녀이다. 당대 역사서술이나 사극 등에서 흔히 조대비(趙大妃) 혹은 대왕대비(大王大妃) 등으로 부른 인물이다.


한국근대사 서술이 주로 흥선대원군의 역할에 중점을 두다 보니 조대비는 수렴청정 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존재가 되어 왔다. 그러나 고종 즉위 과정은 물론, 이후 수년간의 수렴청정기간에 조선의 정사와 경복궁 중건 등에 공식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실제로도 조대비의 뜻이 달랐다면, 고종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은 물론, 경복궁의 중건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존재와 역할도 없었을 것이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궁중에서는 조대비가 가장 윗 어른이었다. 그녀는 고종과 명성황후 등으로부터 나아가 조정 관료들로부터 그만한 예우와 대접을 받으며 만년을 경복궁에서 보냈다.


조대비는 어떠한 인물인가. 그녀는 익종의 비이자 제24대 헌종(憲宗)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1808년(순조 8) 출생이다.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증조부는 고구마를 일본에서 들여오는 등 민생에 업적을 남긴 이조판서 조엄(趙曮)이다.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인 목사 송시연(宋時淵)의 딸이다. 그녀의 숙부 조인영(趙寅永)은 순조로부터 헌종을 잘 가르쳐 인도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당대의 유력가문인 안동 김씨와 함께 외척으로서 정국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진 바다.


그녀는 12세의 나이인 1819년(순조 19)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孝明世子, 翼宗: 1809-1830)의 빈(嬪)으로 간택되었고, 20세 때인 1827년(순조 27) 아들(후일의 헌종)을 낳았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녀의 아들이 장차 보위를 이를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었다. 마침내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세손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효명세자는 익종(翼宗)으로 추숭되고, 그녀는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그런데 신정왕후는 아들이 8세에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수렴청정을 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윗어른이 하는 것으로 선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당시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정왕후에게는 시어머니가 아닌가. 그래서 헌종 때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궁중의 최고 어른이었고, 그로 인해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인맥의 영향이 우세하였고, 상대적으로 조대비의 가문은 세력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온 것은 1857년(철종 8) 순원왕후가 별세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이제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궁중의 대사를 결정할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그녀의 조카 조성하, 조영하 등을 통해 은밀히 장래의 대비책, 요컨대 후사를 내정한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녀는 철종 승하 직후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재황((載晃)을 자신의 남편인 익종(翼宗)의 후사로 정하여 익성군으로 봉한 뒤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이후 그녀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근 3년간 수렴청정을 한 뒤 1866년(고종 3) 물러났으며, 1890년(고종 27년) 4월 83세의 나이로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신정왕후는 주도적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며 왕권과 왕실의 위상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경복궁 중건을 흥선대원군의 책임 하에 추진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존의 정치세력을 개편하기 위해 종친(宗親)들의 위상을 강화하였고, 종친부(宗親府)의 개혁을 통해 이들에게 실직(實職)을 주게 추진하였다. 조대비는 익종의 뜻을 계승하여 과거제도 폐해를 비롯, 각종 폐단도 시정하고자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정책으로 알려진 여러 사업 중 조대비의 뜻이 반영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경복궁의 중건이다. 경복궁 중건은 그녀의 남편인 익종이 세자로 있을 당시 의사를 비친 것으로 전한다. 역대 군주가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처럼, 효명세자 역시도 국왕, 왕실, 국가의 권위를 높이려는 등 여러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규수란 인물이 경복궁 중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이다. 효명세자는 궁중을 나와 민정을 관찰할 때 우연히 박규수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뒤 ‘후일 그대를 기용하리라’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일찍 타계하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으나 조대비가 후일 박규수를 중용하면서 그 약속은 지켜지게 되었다.


고종실록 2년(동치 4년, 1865년 4월 3일)에는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영건도감>의 관리를 임명한 기록이 등장한다. ‘전교하기를, "영건도감 도제조(營建都監都提調)는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으로 삼고, 제조(提調)는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좌찬성(左贊成) 김병기(金炳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 겸 호조 판서(兼戶曹判書) 이돈영(李敦榮), 대호군(大護軍) 박규수(朴珪壽), 종정경(宗正卿) 이재원(李載元)으로 차하(差下)하며, 대사성(大司成) 이재면(李載冕), 부호군(副護軍) 조영하(趙寧夏)와 조성하(趙成夏)를 부제조(副提調)로 차하(差下)하라."하였다.’


이상을 살펴보면, 영건도감에 포함된 인물은 풍양조씨, 안동김씨 등 외척 가문 그리고 전주이씨 왕실 인사가 전부이고, 거기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다른 가문 인물이 박규수이다.


실록에 의하면 석경루(石瓊樓) 아래서 출토된 구리 그릇에 새겨진 ‘국태공’이라는 글자를 놓고 박규수가 이를 흥선대원군을 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흥선대원군과 박규수가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계기였다는 해석도 있다. 석경루는 박규수가 젊은 시절 벗들과 흔히 교유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중건의 대사업, 이 일과 관련하여 효명세자→조대비→박규수→흥선대원군 등의 연계성이 두루 연상되는 실록의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경복궁의 중건은 흥선대원군의 뜻과 의지는 물론, 그 이전 효명세자와 박규수의 의기투합, 그들의 꿈 등이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통해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조대비는 남편의 생전 꿈을 근 한 세대를 격하여 실현한 왕실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꿈을 실현한 것으로 만족했는지, 그녀는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나 조용히 노년을 보냈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물론, 조정 내외 신하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으며 여생을 마쳤다.


고종 즉위 이후 한동안의 정국은 조선 후기에 흔히 보이듯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나 숙청 보다는 권력의 안배와 조화를 꾀한 것으로도 보인다. 즉 풍양조씨, 안동김씨 그리고 왕실과 여흥민씨 가문의 인물과 여타 가문의 인물 등이 두루 조정에 기용되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의 비중과 역할이 고종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두드러졌던 것으로 비친다.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수릉 정자각 [구리시 홈페이지]


1899년(광무 3) 익종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자 신정왕후도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함께 추존되었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익종과 합장되었다.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 내에 있다.


(*사족(蛇足) 하나: 조대비의 친정집으로 전해지는 곳이 현재 북촌에 위치해 있다. 서울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왕비의 친정집은 아닐까. 인현왕후, 명성황후와 관련된 감고당은 현장에서 사라져 여주로 이전되었으나 아무래도 현장성이 떨어진다. 사실로 확인된다면, 여러 모로 많은 가치를 지닐 곳으로 기대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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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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