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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9-09 17:19:03
  • 수정 2018-09-10 11: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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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 [WT DB]


동치(同治) 2년(1863) 12월 8일,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이 승하하고, 불과 12세의 소년이 5일 뒤인 12월 13일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이 바로 그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이후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근 10년 동안 직·간접으로 정사에 큰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이 궁중의 어른 조대비와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다.


조대비도 흥선대원군도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이후 10년간 내외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조대비는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비로 고종 즉위 당시부터 수년간 궁중에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대원군은 근 10년 간 궁 밖에서 대소의 정사에 영향을 미쳤다. 그 외 경복궁의 중건 등 국가의 주요 현안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박규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 조선 조정의 내외 정책은 주로 대원군이 주도한 정책으로 평가해 왔으나, 실제의 역할과 내용 등을 두고 여러 이견이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야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을 과장한 측면이 있고, 실록 등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다. 더불어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한국사 서술에서는 흥선대원군과 왕비(명성황후)의 갈등을 과장하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의 역할을 과도히 부각시킨 점이 있다. 이 모두가 상승작용을 하여 한국의 근대사가 기형화된 점도 많으니, 연구자들의 주요한 목전 과제이기도 하다.


고종 즉위 초기 조정의 내정(內政)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시대 흐름과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서원철폐와 호포제는 백성에게 환영을 받았고, 경복궁 중건도 백성을 고단하게 한 점은 있지만, 왕조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조선의 양대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국립학교에 해당한다. 향교는 조선 전기에 중요한 기능을 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향교나 서원 모두 공자와 맹자 등 중국의 주요 선현과 조선의 주요 선현들 제사를 받들면서 교육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은 지방민을 갈취하는 원망의 대상이 되었고, 군역, 요컨대 병역을 피하려는 자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일부 서원에서는 제향을 구실로 지방민에게 물자와 인력의 징발을 강요하였고, 제대로 응하지 않을 경우 곤욕을 치르게 했다. 야사에 의하면 대원군도 낙백 시절에 화양동 서원에서 기세등등한 유생들에게 봉변을 당하였다. 이런 저런 폐단을 직시하여 조정에서는 전국 600여 곳 서원 중 47개를 남기고 헐어버리게 하였다.


호포제는 군역의 일종으로,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양반은 포를 납부하지 않고 양인만이 부담을 졌으니 불공평하였다. 대원군은 ‘양반은 백성 아닌가. 양반도 세금을 내라!’ 하고 반상 구분 없이 군포를 징수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도록 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공평한 국방의무 수행이자 조세의 형평에 맞는 조치였다.


한편 경복궁은 조선 초기에 건립되어 역대 군주가 정사를 보던 중심 궁, 즉 정궁(正宮)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 후 근 27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왔다.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대를 거치며 경복궁 중건을 주장하는 군주가 없지 않았지만, 이 일이 거론될 때 마다 나라 재정이 어렵다는 양반과 신하들의 만류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고종이 즉위하자 조정에서 이의 중건이 일사불란하게 결정되었다. 그 과정에는 조대비와 대원군의 의지는 물론, 효명세자가 아꼈던 인물이자 고종 즉위 초기 국왕의 멘토 역할을 했던 박규수 등의 역할도 두루 엿보인다.


왕실에서는 솔선해 기금을 내었고,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도 경비를 대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도성을 출입하는 이들의 물품에 통행세도 부과하였다.


이상과 같은 정책 목표는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기강 확립, 국가재정의 확보 등과 일맥 상통했다. 조선 후기에 군권이 추락하여 국정이 혼란을 거듭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기민하고도 놀라운 업적이었다.


▲ 흥선대원군 [WT DB]


그러나 이 시기의 정부 정책에 대해 그리고 흥선대원군에게 많은 비판이 쏟아진 것은 대외정책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바야흐로 해양시대가 도래하는 시점에 추구한 대외정책은 시대착오적이라 비난받는다. 조정과 흥선대원군이 서양 각국의 통상수교 요청을 거부하는 가운데, 시대역행적 태도를 취한 것은 국방 안보의 불안감, 대외 정보 부족, 반대파의 공격에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정치적 입지 등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은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아편전쟁, 남경조약, 태평천국의 난, 애로우호 사건 등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를 놓고 조정에서 의론이 분분하였지만, 정체도 잘 알 길 없는 서양 세력에 막연한 공포심만 늘어가는 상태에서 직접 사정을 알아보려는 장래의 대책은 없이 공론만 거듭되었다. 게다가 사정을 밖에는 알리지 않고 조정에서만 쉬쉬하였다.


청국 조정도 감당하지 못하는 ‘서양 오랑캐’의 침략은 새로운 사상과 종교에 대해 조정이 과민하게 대응하게 된 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조정 인사들과 대원군은 조선에서 은연 중 활동하는 프랑스 신부들을 서양오랑캐의 첩자라고 여겼고, 이들과 연계된 승지 남종삼이나 조선의 천주교도들을 서양오랑캐의 앞잡이라 여겼다. 이들이 우려한 것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조정과 권력의 붕괴였다. 여기서 유발된 것이 천주교도 박해였고, 병인양요, 신미양요였다.


당시의 조정과 대원군 등은 내정 단속은 철저했으나 대외사정에 어두웠다. 그로 인한 자신감의 결여가 ‘나 홀로 권투’(Shadow Boxing) 하듯 쇄국으로 치달았다. 일본이 명치유신과 함께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산업화, 근대화를 향하여 역동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던 것에 비해 당시의 조선은 점점 나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선은 선진 서양 제국과 물꼬를 트고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갈 시점에 방향을 잘못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박은식은 그의 저술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대원군의 용기와 결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해외사정에 대한 무지와 그릇된 정세 판단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르며 나라의 정책 방향을 이끌어간 것은 더할 수 없는 실책이다. 참으로 애석하다.”


<참고문헌>
박은식, 『한국통사』, 삼호각, 1946(초판, 상해, 1915)
이광린, 『한국사강좌-근대편』, 일조각, 1981.
하정식, 『태평천국의 난과 조선왕조』, 지식사업사, 2008.
이완재, 박규수 연구, 집문당, 1999.
이민원, 『대한민국의 태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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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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