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9-02 16:52:43
기사수정


Ⅰ. 개항과 근대화 과정의 시련


19세기의 산업혁명은 인류 문명사에 대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주요 산업이 이동하고,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던 계급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사회로 점차 변화해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업혁명은 분명 인류 역사의 큰 전환점이자 오늘의 번영을 가져 온 ‘대혁명’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명암이 함께 있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선두주자로 올라 선 유럽 각국은 원료 확보와 시장 개척의 필요에 따라 점차 주변 세계로 눈을 돌린다.  ‘문명개화’, ‘근대화’의 기치 아래 아프리카,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마침내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뻗치기에 이른다. 그에 동반한 문명과 무기, 인류사회에 늘 존재해 온 양날의 칼과 같다.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무너지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한 일본은 천황제를 발판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세력 확대를 꾀한다. 이 무렵 조선은 국가의 진로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외세의 도전에 속절없이 무너져 간다. 한국의 근대사는 이런 내외의 시련 속에 출발하였고, 그러기에 미래는 매우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21세기의 한국, 국력이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있다. 아마 단군할아버지도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고 놀랐을 것이다. 이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가 되는 것, 그런 목표 설정은 누구도 나쁘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당장의 문제를 하나하나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일 하나는 역사에서 살펴보는 교훈이 아닌가 한다. 그것도 최근사에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연재하게 된 첫째 이유이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가르침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위키디피아]


[서양 근대화 세력이 동아시아에 몰아치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세계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이 도버 해협을 건너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은 경쟁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아시아ㆍ아프리카에 경쟁적으로 진출하며 상품을 공급하고 원료를 확보해갔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포함외교’(gunboat policy)로, 당시 ‘상품이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면 군대가 넘어간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산업화가 한창이던 19세기 중반, 동양 각국은 산업화 이전의 단계였다.


이중 일본은 미국, 영국 등과 무력 충돌 끝에 강제 개항한 후 메이지 유신을 거쳐 신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서구지향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개항한 이후 일본의 산업구조 변화와 발전은 신속했다.

'

대외적, 상징적으로는 ‘천황’ 중심의 절대체제였으나, 실제로는 청소년의 교육기회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가 하면 정치적으로는 의회가 구성되어 수상이 국정을 이끌어 가는 근대적 국가체제였다.  


청국도 아편전쟁 이후 양무운동을 추진하며 부국강병을 모색해 갔다.


그러나 청국은 덩치가 큰 만큼 상대적으로 느렸고, 전통시대의 제도와 관습이 새 시대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었다. 해외를 견문하고 돌아 온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귀국 후 중용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누적된 전통의 무게와 자부심, 더딘 정치권력의 변화 때문이었다.


정치체제는 황제 중심의 전근대적 국가체제였고, 전국 청소년의 신식 교육이나, 의회의 구성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있던 조선은 동북아 삼국 중 외부와의 접촉이 가장 늦었다.

상대적으로 국토와 인구의 규모가 작았으며, 전통적으로 군사력과 물산 모두 취약하였다.

게다가 전래의 산업기반은 농업이었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유교주의 신분사회였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전통이 선(善)이고 신식은 천박한 것’이란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농업사회의 윤리를 최고의 가치관으로 삼던 유학자들은 세계의 물산과 지리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나이 어린 군주보다는 주로 외척 세력에 실권이 주어져 있었다.

조선 후기 이래 외척세력들은 비변사 등을 장악하고, 재정과 군사 분야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소수 가문이 재정과 군사 분야의 요직을 장악하다 보니 국가 보다는 가문권력이 우선시되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군주의 집권력이 약해진 가운데 토지에 관한 정책인 전정(田政), 군 복무에 관한 정책인 군정(軍政), 백성에 대한 곡식 대여 정책인 환곡(還穀) 등 3정이 문란해지고 지방관의 탐학이 만연하였다.


▲ 법정으로 출두하는 전봉준(1855-1895, 왼쪽에서 세번째). 체포과정에서 다리를 다쳤다


19세기 민란과 동학농민의 난은 이러한 백성의 고통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이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가 백성들 사이에 뿌리를 내려갔다.


하늘 아래 만민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교리가 이들에게 충격적인 의식 전환과 함께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동학도 천주교도 ‘만민 평등’을 지향한 것이니 백성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계속)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234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최신 기사더보기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